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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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다케와키 마사카즈라는 인물이 정년퇴직 축하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쓰러지면서 시작한다. 다케와키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훗타 노리오라는 직장동료의 시점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초반부의 이런 설정은 다케와키의 삶을 규정하는 외부적 시선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킨다. 직장 동기이자 친구였던 다케와키였지만, 훗타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린 대상이었다. 주변에서 망각된 존재, 그것이 다케와키였던 셈이다. 그리고 훗타는 마침내 병원으로 황급히 달려가 누워있는 다케와키 앞에서 “잊어 가고 있던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20쪽) 훗타가 병원을 방문한 이후에도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다케와키를 둘러싼 망각과 기억의 교차가 지속되며 서사가 추동된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기억에 대한 소설’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2.
물론, 망각된 존재는 다케와키뿐이 아니다. 1951년생인 다케와키가 살아온 세계는 집단적 기억이 개인적 기억을 압도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케와키는 그의 발화를 통해 자신이 고도 경제 성장의 부산물이자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최초의 세대라고 반복적으로 설명한다. 기적의 시대라고도 묘사되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고생이란 말은 이미 죽은 말이 되었다.”(71쪽)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집단적 기억이 팽배한 시대 속에서 개인의 기억을 지우고 살아야 했던 다케와키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망각된) 개인을 표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다케와키가 과거를 회상했을 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1973년의 오일쇼크,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1974년 무차별 테러 사건이자 연쇄기업 폭파 사건 중 하나인 미쓰비시중공 폭파 사건 등과 같은 시대의 기억이었다.

3.
집단 기억 속에서 다케와키는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서사를 잃고 경제 성장의 굴곡진 흐름 속에 예속된다. 그러다보니, 정년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다케와키에게 있어서 “직장의 정년퇴직이 인생의 정년퇴직”(93쪽)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년퇴직 축하연 직후에 그가 쓰러졌다는 것은, 그 이후에는 삶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어느 순간 회사에서의 노동은 절대적 명령이 되었고 다케와키는 일하는 동물로 살아왔던 셈이다.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에 의하면,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서사의 종결은 불가능하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에서 현대인의 죽음은 가족의 동의를 구하고 나서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이후에 내려지는 의사의 사망 선고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다케와키는 ‘죽음’이라는 삶의 마침표도 제대로 찍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조차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4.
하지만 『겨울이 지나간 세계』에서는 다케와키의 죽음을 유예시키고 그에게 ‘기이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카키바라 가쓰오 같은 남성과 마담 네즈, 이리에 시즈카, 미네코 등과 같은 여성들을 만나면서 다케와키가 외면하려고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직면하기 시작한다.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억들은 다케와키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결과적으로는 치유를 경험하게 한다.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기에 없었던 과거로 치부했던 어린 시절부터,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놓았던 4살 때 죽은 아들에 대한 기억들 등등. 다케와키가 자신의 기억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깨닫는 것은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자신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의 직간접적인 축복 속에서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5.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기 시작하면서 다케와키는 이제 마음 놓고 죽음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케와키의 아내와 딸, 사위는 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고 싶어 하고, 다케와키도 이제 자신의 기억을 꺼낼 준비가 되어 있다. 다케와키는 확신한다. “살아있기만 하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반드시 행복해진다”(418쪽)는 것을. 환상적 체험의 공간 속에서 망각되었던 기억의 대상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에게는 용서를, 누군가에게는 화해를, 누군가에게는 약속을 건넨 다케와키가 마지막에 “좋아. 살아가자!”(430쪽)고 외친 것으로 보아, 이제 다케와키는 병상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 뒤, 결혼을 해서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254쪽)라는 꿈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꿈을 꿀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6.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1951년생 일본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전쟁과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흐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지점들을 마련하고 있다. 다케와키가 스스로 자신의 세대를 꼰대, 갑질, 아재라는 용어와 연결시킨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에 다름 아니다. 세세한 양상들은 다르겠지만, 거시적인 국가의 서사 속에서 외면당하거나 배제되어왔던 개인의 서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제대로 구축되지 않고 망각의 영역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물론,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갈등을 상당히 환상적으로, 낭만적으로, 신파적으로 풀어냄으로써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의식을 가볍게 처리해버린다는 치명적인 아쉬움이 존재한다. 그래도 적어도 특정 세대의 ‘기억’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소설로서의 역할은 어느 정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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