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를 절대화함으로써 삶의 근원적 무의미를 망각해버리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다. 반면, 주인의 도덕은 모든 주의와 가치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거기서 나오는 허무의 상태를 기꺼이 끌어안는다.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니힐리스트의 길일 것이다. 니힐리스트가 주의와 도덕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그 '놀이'에 꽤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주의나 가치가 근원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의식을 놓지 않을 것이다. -204쪽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말했다. 개념도 낱말이기에 그것의 의미 역시 사용에 있을 것이다. 철학의 개념은 사태를 정교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확대경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철학을 한답시고 확대경을 닦는 데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매끄럽게 닦여 타인의 앞에 놓인 자신의 고성능 렌즈에 도취되곤 한다. 그들이 망각해버린 것은 그 확대경으로 사물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렌즈라 하더라도 뭔가를 들여다보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결국 남에게 자랑하는 데에 소용되는 값비싼 수집품일 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개념들은 한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들이다. 그것들이 내게 인상을 남겼다 함은, 그것들이 현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주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정의를 다른 책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개념들을 현실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6쪽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크게 세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범죄, 창조, 자살이 그것이다. 먼저 ‘범죄’는 산문적 삶 속에 인위적으로 영웅적(?) 서사를 도입한다. ‘예술’은 창작을 통해 삶에 시적 리듬을 부여해 그것의 지루함을 견디게 해준다. ‘자살’은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으로, 삶이라는 지루한 산문에 그냥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길은 서로 합류할 수도 있다. 가령 총기 살인범들은 대개 범죄를 자살로 마감하고, 연쇄 살인범들은 종종 범죄를 예술로 착각하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는 자살을 일종의 예술로 연출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영웅적인 것은 이 절대적 지루함을 분과 초 단위까지 충만하게 견뎌내는 인내심에 있지 않을까? 어느 에세이에 나오는 발터 베냐민의 말이 혹시 답이 될지 모르겠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정이 아니라, 자살이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