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심성보.이동기.장은주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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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는 독일 남부의 작은 시골도시 이름이다.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주도(州都) 슈트트가르트에서 동쪽으로 수십킬로 떨어져 있다. 교육계에 종사하지 않거나 교육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곳이다.

 

그런데 약 2년 전,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표방하며 창립한 사단법인 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민주시민교육 방법론으로 독일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소개하면서 많은 이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에 징검다리교육공동체는 지난달 이 협약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책을 펴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1976년 서독의 보수와 진보 및 중도를 망라하는 교육자, 정치가, 연구자 등이 이 작은 도시에 모여 정립한 일종의 정치교육 방법론이다. 이들은 그 이전부터 치열한 토론을 통해 이념과 정권에 치우치지 않는 정치교육 방법론을 마련하였다.

 

토론회를 마친 후 어떤 선언이나 합의문 또는 협약서 형식의 결과물을 냈던 것은 아니다. 이날 논의되었던 내용을 나중에 정리하여 책자로 발간하였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며 독일 정치교육의 대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모든 공교육 영역으로 확대 적용되어 오늘날까지 독일 정치교육(민주시민교육)의 헌법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협약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이 골자다. 강제성의 금지(강압적인 교화 교육 또는 주입식 교육의 금지), 논쟁성 유지(수업시간에도 학문과 정치에서의 실제 논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낼 것), 이해관계 인지 및 정치적 행위능력 강화(학생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이해관계를 분석할 수 있고 합당한 실천 능력을 기를 것) 등이다. 각 원칙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보완적이다.

 

독일에서 이런 합의가 나온 역사 배경은 우리와 다르면서도 무척 닮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가 피해국이면서도 패전국 취급을 당했다면, 독일은 전범국이면서 패전국이었다. 강대국에 의해 분단되었고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68혁명 이후 서독의 진보-보수 갈등은 교육계에서도 극렬했다. 교육현장의 극심한 대립을 우회하면서, 현실의 정치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이해하며 논리와 비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민주시민을 길러야 했다.

 

그 절실한 필요가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낳았다. 이 합의는 방법론상의 대원칙일 뿐 교육내용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정치세력의 합의가 가능했다. 그리고 독일의 민주시민교육과 민주주의 발전에 튼튼한 디딤돌이 되었다. 특히 독일 통일 이후 상호 이질적이었던 동·서독 지역 주민들과 통합적 민주시민교육을 하는데 적절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대원칙에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압적 교화 금지 원칙이 교육의 본질적 가치 교화를 소홀히 할 가능성은 없는가? 논쟁 재현의 현실적 또는 도덕 규범적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쟁점 토론만을 중시하여 배려와 공감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이해관계 인지 원칙의 협소한 적용으로 이기적 시민을 길러낼 위험은 없는가? 정치행동 지향이 시민교육의 목표인가? . 실제 시민교육과 수업에 적용하기 까지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1976년 한차례 토론회로 끝나지 않았고, 이후에도 세부 사항에 대한 수정제안과 토론을 지속해 왔다.

독일이 좌-우 세력의 합의된 정치교육(민주시민교육) 방법론을 정립한데 반해, 우리나라는 민주시민교육을 지금까지 외면했다. 사실상 금지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학생을 수동적 존재로 보고 정해진 교육과정상의 박제된 민주주의 이론을 주입하는 것이 민주시민교육의 전부였다. 학생은 늘 미숙한 존재로만 봤다. 그러니 19세 미만에게는 투표권도 주지 않는다. 그나마 20세에서 19세로 낮춘 것이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민주시민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어떤가? 그들 역시 정치적 금치산자다. 교원은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기본권이 제한된다. 정당법에 의해 정당가입은 물론 지지 정당에 대한 정치후원금 기부조차 금지된다. 국가공무원법에 의해 집단행위가 금지되어 시국선언 같은 최소한의 정치적 의사 표현도 처벌받는다.

 

공직선거법과 지방교육자치법에 의해 근무와 상관없는 모든 생활에서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된다. 그러니 선거 기간 동안에는 후보별 교육정책을 평가하여 표현하는 것조차 불법이다. 지방교육자치법에 따라 초·중등교육을 통할하는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거나 공직선거법에 따라 모든 선출직에 출마하려면 교직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교실에서 현실 정치 논쟁점을 얘기하다간 자칫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니 민주시민교육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사회교사 조차 소극적인 수업만 할 뿐이다.

 

정치적 열등시민 교사가 수동적 학생에게 고정된 민주주의 교과서 지식을 가르치고 획일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시민교육의 현주소다. 교사에게 정치기본권을 주고 학생의 능동적 정치 학습과 행동을 보장하자니 뭔가 불안하다. 교사의 일방적 정치 설교와 세뇌, 그로 인한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교육현장을 망칠 것만 같다. 현실정치를 은폐하고 활발한 민주주의 논쟁은 애써 눈감아 왔으니 우리에게 민주시민교육은 이름뿐이었다.

 

우리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876월민주화운동으로 이룩한 불안한 형식 민주주의가2017년 촛불항쟁으로 도약하고 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원적 이익, 다양한 민족과 인종과 문화가 이 땅에 공존한다. 70년 넘는 분단체제에 균열이 나고 있고, 동북아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의 수동적 시민교육으로 결코 새 시대를 맞이할 수는 없다.

 

적극적 민주시민교육이 절실하다. 정상시민으로서의 정치기본권을 갖는 교사와 능동적 학생이 현실을 직시하며 생동감 있게 사고하며 학습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의 일방적 정치선동의 불안을 불식하고 어떤 정치 세력이나 당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살아있는 민주시민교육 방법론을 마련하고 합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적극 참고할 만한 사례가 바로 보이텔스바흐 합의다. 이 책이 그 논의의 불을 당긴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읽으며 고민하고 실천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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