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 - 시대의 모순과 대결한 불온한 경제학자의 초상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삼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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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그 이름을 처음 알았던것은 예전 인물현대사 프로그램을 유투브로 몇달전에 시청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보고 난 후 나는 경제학자 박현채의 이름과 그의 생애를 알게되었다는것에 감사했다. 박현채, 다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사회주의 성향의 친척도 친척 이지만, 초등학생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 했고, 삼국지를 읽고 감명 받고 그와 동시에 같은반 급우와 의형제를 맺었지만 이 의형제로 맺어진 급우들의 운명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박현채는 본인의 자서전을 쓰다 운명을 달리 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 삼국지로 맺은 같은 반 급우를 기억하는 장면은 박현채 본인의 순수한 기억이었다. 


10대 시절, 우익 학생들과의 대립도 마다 하지 않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고, 이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 시기의 혼란스러운때 학생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소년 박현채의 기억과 동시에 좌익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 만으로 총살을 당할 수 있었던 그때, 덤덤히 이러나 저러나 죽을 운명이라면 니가 하고 싶은데로 하라는 어머니 조언을 듣고, 그 길로 큰 절을 올리고 결행한 빨치산 행, 


나중에 친구의 조언으로 하산을 결행할 때의 심경, 박현채는 빨치산 부대에서 하산 하며, 자수를 하게 되었는데 면서기 출신의 그의 아버지가 백방으로 로비한 끝에 구명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1년여만에 부지런한 공부로 서울대 상대 입학으로 본인의 비상함을 입증하였고, 

서울대 재학시절, 혹시나 빨치산 경력 때문에 가족과 자신에게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 조심하였지만, 학부 졸업후 농업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곧 같은 대학에서 '자본주의와 소농 경제'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내가 박현채 평전을 읽으면서, 몇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지만 첫번째로 들자면, 서울대 석사 졸업 논문에 농촌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정부수립 이후 국토개혁의 시작은 농촌 경제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이후 농촌의 빈곤을 걱정하는 혁신 세력의 존재와 더불어 박현채 개인으로서 농촌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 박현채는 89년까지 조선대 교수로 임용되기 전 까지 흔히 말하는 보따리 장사, 즉 시간강사로 보내게되었다. 군 제대후 농연에 다시 복귀하면서 서울대 상대 임용을 보장 받았으나, 기존의 교수진들의 "대접요구"가 못마땅했는지  어떤 자리에서 상을 뒤엎었던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전임강사 자리를 놓치고, 서울대와의 연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박현채의 성격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특히 후배들을 대할 때는 심하게 말을 해서 폭군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이다가도, 다른 한편으론 관용과 자상함이 함께 있었서, 관운장이라는 별명이 따라오기도 하였다. 그의 거침없는 언행으로 인연을 끊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주변에는 인재들이 많이 보여들였다. 술자리에서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등의 독재자 이름을 이웃집 강아지 부르는듯 하기도 하였다고, 5.16군사 쿠데타 세력의 정권 정당성을 확보 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서두르며, 동시에 간첩 조작도 서슴치 않았는데 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초를 겪게 되고, 어처구니 없이 항소심에서 은닉 혐의가 적용되어 1년 을 복역하기도 하였다. 


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치게 되면서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를 구상 하게 되었다. 그때의 후보 김대중이 박정희와의 대결에서 정책 대결을 주도 하게 되면서, 지식인들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 이라는 책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 정치사에서는 정책 대결의 장을 여는 획기적인 정책 이론이자,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인 이론인 대중경제론으로 평가 받는다. 


이후 78년 4월 민족경제론이 나왔다. 71년 대선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안정국이 강화 되며, 유신이 선포되고,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관련자 8인을 지목하여 처형하는등 독재 정권의 칼날이 서슬퍼랬다. 이러한 기간을 거치며, 학문에 더욱 몰두한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펴낸것이다.


민족경제론은 박정권이 자립 경제론을 내세우면서도 지극히 비자립적인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매판성이 강화되는데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금서의 딱지가 붙었음에도,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더불어 명저로 평가 받고 있는데, 사회과학의 시대라는 1980년대에 청년들의 의식화를 위한 저작으로도 분류되었다. 


박현채, 인간성 회복을 위한 경제 이론을 추구 하며,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 하기도 했다. 

경제학자 박현채, 어린시절 자라온 환경으로 부터, 의식화가 진행되어 그가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할때 쯤 본래의 성격과 더불어 사리에 맞지 않는것에 불같은 화를 내며, 저항했고 사회적으로나 작게는 학계에서 반체제적 인물로 낙인 찍혔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가족을 구성하며 자식들에게는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고, 아빠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든든히 먹고 커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는 그의 둘째딸의 회상이다. 


그는 민족경제론으로 제 2회 단재학술상을 수상 하였다. 이 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뤼순 감옥에서 옥사한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이때의 소감의 한 부분이다. "~저의 경제학 연구에 있어서 더할 것 없는 성과는, 주관적으로 역사앞에 충실한 삶을 다짐하면서 역사적 요구가 있는 곳에 참여한다는 원칙 위에 선 소신 입니다. 민족경제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적 체계는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의도된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양한 현상의 사회적 실천상의 요구에 따른 보다 정확한 인식을 위한 계속적 노력의 입은으로 제기 된 것 입니다."


단재상은 그가 사회에서 받은 첫 수상이었다. 


시대와 불화하면서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의 삶으로 생각 되어지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 받은 단재상으로 감회가 남달랐을것이다. 


작가 김삼웅 선생은 박현채의 삶을 이렇게 평가 하였다. 

시대의 모순과 대결한 불온한 경제학자의 초상, 

태백산맥의 글감을 위해 고심하던 조정래를 만났던 시기도 그 즈음해서이다. 박현채의 요청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곧 의기투합하여, 빨치산 출신 박현채의 옛기억을 따라 갔다. 그리고,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조원제로 박현채의 어린 시절이 다시 태어난것이다. 


작가 김삼웅 선생의 박현채에 대한 글은 그야말로 성심을 다해서 박현채의 심정에 동화되어 쓴 글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에 임용되면서 뒤늦게 나마 다소 안정되고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그 기간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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