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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평점 :
이 책 제목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이 말의 첫 느낌은 '죄송스러움,미안함'이었다. '당신이 편히 쉬고 있는 시간을 제가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읽혔다.
책을 읽다가 제목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이란 구절이 등장하기도 했다. 117쪽>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할 때 쓰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늘 이 말을 썼는데,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과 말이다.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널 망쳐주겠어, 나쁜 년, 이런 뜻일 수도 있다.
책 구절에 따르면 난 전자의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해석이 어떻게 되든, 어떤 이의 평화로운 순간을 깨뜨렸음은 변함이 없다. 어떤 이는 이 책을 골라서 '읽는' 혹은 '읽을' 독자를 의미할 테다. 그렇다면 이 책은 우리들의 평온을 어떤 식으로 깨트리는걸까. 그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겠다.
이 책 주인공과 주인공의 남동생은 어렸을 때 미국인에게 입양되었다. 주인공과 주인공 남동생 그 둘은 같은 핏줄이 아니다. 나름 여자 주인공은 뉴욕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지냈다. 문제아이들을 보호.감찰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는 원래 양어머니,양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밀워키에서 지냈었다. 한때 그녀는 예술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던 예술가였지만, 표절의혹을 받아 예술가로서의 영예로운 생활은 불씨처럼 빠르게 꺼져버렸다. 그리고 이후 지긋지긋한 밀워키에서 떠나 뉴욕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반면 남동생은 양부모와 함께 계속 밀워키에서 살았다. (스포를 할 수 없기에, 남동생에 관한 다른 내용은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한국인이지만 중국인이라고 오해받거나 동양인이라고 때때로 차별받기도 했고, 타지역보다 물가가 다소 비싼 뉴욕에서 그래도 하루하루 버티며 '나'는 그럭저럭 지냈었다. 문제아이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집에서도 아이들과 통화하기도 하는 등 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 뜬금없이 제프 숙부에게 전화가 왔다. 그 내용은.. 입양아 동생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밀워키 집을 나서고 난 후에 양부모와의 연락을 거의 하지 않고 지낸 '나'는 동생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자살의 이유 혹은 정말 동생이 자살을 한 건지 알아내기 위해.) 잠시 일을 그만 두고 전에 살던 밀워키 집으로 출발한다. 책 내용 대부분은 동생의 장례식날이 되기 전 '나'가 밀워키에서 지내면서 일어나는 내용이다. 이야기는 동생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에 끝난다.
딱 한 줄로 줄거리를 표현하자면, '입양아 남동생이 자살을 했고, 그 죽음을 납득하지 못한 '나'는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밀워키 양부모집에 간다.' 는 내용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어두침침한 분위기이다. 무서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컨저링이나 그런 비슷한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 분위기가 음침해서 그런지 그런 영화의 포스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분위기를 김영사가 잘 캐치해서 책 표지에 잘 녹여낸 듯 하다. 탁한 색감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분위기에 딱! 맞는 표지라고 생각한다.
p.16
동생이 죽었을 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서른두 살 나이에 애도 없는 생리 불순 독신녀였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꼿꼿하고 평범한 존재가 보였다. 때에 따라서는 구부정하고 평범해 보였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내 평범함과 화해했다.
나에게 선천적 재능이나 음악적 기질이 없어 쓸모없어진 피아노 레슨과 화해했다. 내 머리에서 어깨까지 뻣뻣하게 늘어진 볼품없는 흑발과 화해했다. 심지어 하루는 내 자궁과도 화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자신을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주연이 아닌, 조연, 심지어 엑스트라라고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드라마 속 조연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연들은 다 얼굴도 예쁜 건 기본이고, 항상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기곤 한다. 잘생긴 사람들이랑 접촉하게 된다거나. 아니면 어떤 능력이 특출난다거나, 엄청 엄청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항상 있다거나,, 하는 등 말이다. 난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일까 난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는 우울한 생각을 이따금씩 했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남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는 자신의 '평범함'을 예전부터 인정했다. 책에선 그걸 위에 구절들로 표현하고 있다. 마음에 들었다.
p.82-83
~~멀리 가족 여행을 떠날 때면, 우리가 돌아왔을 때 밀워키의 모든 것이 그대로일 거라고 내 동생을 안심시켜야 했다. 양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집을 보렴.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아무 데도 안 간단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내 동생의 두려움은 끝이 없었다. 오히려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생각만 더욱 또렷해졌다. 걔는 평생 날씨를 두려워했다. 어쩌면 그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모습은 비탄의 울부짖음이었을지 모른다.
동생은 날씨와도 같이 매 순간마다 달라지고, 그렇기에 쉽사리 추측할 수 없는 것들에 두려움을 느꼈나보다. 복잡하지 않고,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 동생의 그 모습을, 누나인 '나'는 비탄의 울부짖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p.134
내 입양아 남동생은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외국에 가본 적이 없고, 운동도 하지 않았으며, 양부모와 토머스 같은 사람들하고만 이야기했고, 컴퓨터로 영화와 스포츠 경기를 봤으며, 방 안에서 항상 배경음 삼아 책상 위에 선풍기를 켜놓았다. 걔는 조용한 것들을 좋아했어. 나는 양아버지의 서재에 앉아 생각했다. 선풍기는 걔를 진정시켰을 테고, 처음에는 DVD로 사다 나중에는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로 수백 편이나 모은 영화도 위안을 줬겠지. 하지만 세상 모든 위안도 걔의 자살을 막지 못했어.
p.150-151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헬렌? 양아버지가 대꾸했다. 우린 걔가 어떤 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두 분이 걔를 잘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고요.
걔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우리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너보다도 우리와 많은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지금 넌 우리가 걔를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말하는구나.
---- 150~151을 보면 든 나의 생각-- <줄곧 함께 있었다고, 가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안다는 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