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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평점 :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을 만났다. 소설가의 산문집, 에세이스트의 산문집, 카피라이터의 산문집과는 다른 시인의 산문집. 모든 꼭지가 시가 밀려오는 방식으로 오는 것 같았다. 책에서 시는 몸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쓰는 일도 읽는 일도. 시인님은 육체를 통해 영혼이 깨어났고, 그래서 아직도 시는 육체적인 것,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64쪽)고 했다. 그리고 좋은 시를 읽을 때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좋은 시들은 몸이 일하게 만든다(131쪽)고도 했다. 그런 방식으로 이 산문집도 읽힌다. 고모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면(「고모 방」) 젊은 고모의 외로움과 아름다움에, 늙은 고모에 대한 아쉬움과 아름다움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할머니, 아빠, 바보 이반, 클레멘타인, 슬픔에 대해서 쓴 글들도 몸이 먼저 느낀다. 찌르르 하고 찡 하면서 몸이 알면, 그 다음 머리가 아는 식으로 이 책을 읽어갔다. 그렇게 읽는 동안 내 몸과 마음에 많은 흔적들을 성실하게 남겨준 책이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 P81
손해 보는 사람들, 좀 느린 사람들, 에둘러 가는 사람들, 도무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이 약해 세상에 잘 속는 사람들, 사랑할 때 순정한 사람들, 꼼수를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 속은 줄 알아도 허허 웃거나 고개를 숙이고 울 뿐 뭘 못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정말 사랑하지? 사랑 안 하고 못 배기지? ... 약자라는 말도 불쾌해. 우리는 그냥 우리식대로 ‘바보 이반‘이라고 부르자. 세상에는 바보 이반들이 꽤 있고, 그들이 있어 아직 죽을 만큼 나쁘지 않은 거겠지. - P94
하지만 너무 사랑해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자주 할퀴어놓고는 돌아서서 운다. 이건 정말 진부한 얘기다. 하지만 사는 것은 대체로 진부하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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