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준 선물, 감자 이야기
래리 주커먼 지음, 박영준 옮김 / 지호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감자라는 하나의 먹거리를 통해 서구사회의 다양한 층위와 변동을 치밀하게 다룬 책이다. 유럽인들에게 처음 소개된 17세기 중반부터 200여년에 걸친 기간동안 '악마가 준 선물', '부도덕하고 불길한 식물', '게으름과 빈곤을 조장하는 먹거리'라는 끊임없는 비난을 받아온 감자가, 부당한 편견의 긴 터널을 뚫고 '감자 승리!'를 외치게 되기까지의 유럽문명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와 읽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에게는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읽을거리임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관된 느낌은 '치밀하면서, 또한 매우 자유롭게 썼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하나의 일관된 논리를 주장하기를 거부한다.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명확한 결론을 내리려 하기보다는, 다양한 측면과 가능성을 모두 제시한다. 적어도 저자는 감자에 대해 오랫동안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온갖 자료를 모아 이만한 분량의 책으로 만들면서도, 감자에 대한 환상 만들기에 빠져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치 물이 흘러가듯 논리를 전개한다. 한 가정의 초라한 부엌에서부터 덜컹거리고 진흙에 빠지는 도로사정, 산업혁명기의 도시공장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의 생존에 목을 매는 빈민의 일상에서부터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상가의 논리, 이들을 통제하고 달래는 국가정책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층적 요인들을 '감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종횡무진으로 자유롭게 고찰한다.

하나의 대상을 연구하는 데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무엇일까? 기존의 역사적 연구는 정치·경제 중심의 연구였고, 역사를 어느 정도 통일되고 단선적인 발전과정으로 파악했으며, '위로부터'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감자이야기'와 같은 접근은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했던 사소함들이 어떠한 힘으로 역사에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류의 역사 주변에 얼마나 무수한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지를, 하나의 이론과 모델에는 부합하지 않는 역사적 현상의 다양성과 모순성, 복합성과 중층성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아울러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 되어왔던 서민들을 주어진 삶의 조건에 수동적으로 반응한 '소리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꾸려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아래로부터'라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피상적인 역사서술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연구를 진행하는 관점이 기존의 역사학이나 사회학의 것과는 판이하다. 만약 이들이 감자에 대해 연구했다면, 감자가 당시의 경제적·사회구조적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빈민을 구제하였고 인구증가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이 책에서와 같이, 감자라는 먹거리가 그것의 주된 소비층인 빈민층에게 어떻게 '경험'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구조적인 측면보다는 인간경험을 중시함으로써, 단순한 인과적 분석과 설명이 아니라 상황의 이해와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 구성원의 경험과 사실적인 설명에 치우침으로써, 그 사회를 살피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틀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은 행간을 통해 느껴지는 글쓴이의 '노력'과, 작고 일상적이고 하찮게 생각해온 것을 통해 거시적인 사회구조와 역사의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으로 충분히 상쇄될 만하다. 우리의 감자 역시 빈곤과 수탈의 역사 속에서 눈물과 애환으로 점철된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조선의 감자'를 통해 역사의 뒤안에 있는 민중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줄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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