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시대 -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노정태 지음 / 반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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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객시대의 저자는 노정태입니다실패한 386들이 20 까기에 바쁘던 시절어쩌다 보니 20대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불려 나온 청년으로 기억합니다그리고  청년은 어느새 새파란 젊은이에서 그냥 파란젊은이로 넘어가는 나이가 되었고그의 입장에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를 '논객시대'라고 명명하며 앞에  있습니다.

우선, X부터 Y, N등등 수많은 세대가 지나 갔지만 뭔가 모호하던  때를 부를  편리한 이름 하나가 생겨서 반갑습니다그래요대학에 들어가면 당연히 세미나라는 과정을 통해서 모두 함께 세계를 의식하고바보 과대표가 될지 볼셰비키가 될지 결정해야 하던 운동권의 시대의 다음은 무슨 시대였는지운동권의 시대가 지나고 20대가  청춘들은 어떻게처음 세계를 의식했는지 궁금 했었는데논객이라는 단어가  수수께끼의 일부를 풀어준 느낌입니다. 90년대 후반 부터 20대의 일부는 레닌이 아니라 김일성도 아니라 논객을 따라 오거나논객에게 부딪히거나논객을 쫓거나논객과 대립하면서 살아 왔는가 봅니다.

 

 책에는  9명의 논객들이 등장합니다작가는  책이 거칠게나마 서평이라더군요. 9명의 논객이 내놓은 책들을 기반으로 <논객시대> 썼기 때문이며거친 이유는 자신의 20대를 정리하며 30대를 모색하는 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권 한권의 평보다는  책을  사람의 특징을 구성하는데책이라는 수단을 동원한 것이기 때문에 디테일하기 보다는 거칩니다  생각을 보태 놓은 아래의 감상문 만큼 거칠기야 하겠습니까만(이건 출판할게 아니니깐 용서~)

 

먼저 첫번째 손님은 강준만입니다.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고그가 만든 인물과 사상이라는 글터는 만든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는 여러가지 파장을 불러 왔지요정말로 많은 부분에서 강준만 교수의 의견에 동조했었단 기억이 납니다지금도 그의 생산력에는 경의심을 가지고 있고요.

 

 다음 진중권이로군요.

지금의 모두까기 인형을 기억하는 사람들 너머의 진중권은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였습니다 전투력생산력그리고 강철 멘탈은 불가사의할 지경이였지요.

2012년의 진중권은 조금 이상한 존재였고어쩐지  답지 않았으며 만큼 절박했지만결국은 졌다.라고 정리하고 넣어놓기에는 정말 아쉬운 사람입니다그러나 무슨 염치로 계속 닭잡고 소잡는 일에 그를 동원할  있겠습니까언제까지요 시킨다고  사람도 아닌  같지만 계속 닭잡고 소잡는거 지켜보는 일도 도리가 아닌  같기는 합니다.

그와 그의 하늘에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다음 손님은 유시민.

지식소매상으로 위장한 정치도매상그러나 결국 부도난 도매상노무현의 정치적 이익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였던 유시민의 실패는 노무현의 실패를 나타내는 존재자입니다 때는  정도면 괜찮다 싶었던 시절이 있었지요수평적 정권 교체는 이루어졌고조선일보는 제몫만 남았으며한나라당은 쪼그라들었던  민주노동당이 10석의 원내 정당이 되었던이제  마음 놓고 내가족만 챙겨도 될것 같은 때요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해답의 일부는  김선일씨의 두건을 쓰고 울부짖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야멸차게 내뱉던 유시민의 모습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국익을 위해 사람 목숨을 희생시킬  있는 사람은 새누리당에도쎄고 쎘는데 말이죠.

 

소련에서 왔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남자박노자가 네번째 손님입니다제가 가끔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잊는 바로 그분 이신데요.

 

박노자는 싸이뿐 아니라 비틀스와 바그너도 같은 방식으로 비판할  있는 사람이며적어도 당분간은 이런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고로 문제의 핵심은 박노자가 싸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아니라,싸이의 '강남 스타일' 그렇게 이해하는 박노자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가 아닐까? 라는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박노자는 현장에서 멀어져서 달라진게 아니라 오슬로에 있거나 서울에 있어도 마찬가지인겁니다.

 

다만 박노자는 훌륭한 국산렌즈라면서도 단호한 정치적역사적 목적을 향해 초점을 맞출수가 으며 이유는 너무도 많은 것을 한꺼번에 배울  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일 수도 없다라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   없었습니다원래 교수는 이것저것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존재이며목표를향해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본인몫이기 때문입니다크크

 

다섯번째 손님은 우석훈.

고장난 시계를 들고 뛰어다니는 토끼이자책사를 꿈꾸는 C 경제학자랍니다.  우석훈에 의해 세상에 불려나온 20 논객 출신이라 그런지우석훈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애정(?) 느껴집니다. ^^

우석훈에 대해서는 이것 한가지는 덧붙여 놓고 싶습니다그는 자신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촉의 강유를 젤 마음에 들어한다고 했었읍니다. 그 이유는 제갈량도 유비도 오호장군도 없는 촉을 10년 넘게 지켜냈고, 강대국인 위를 상대로 끊임없이 전선을 구축한 사내이기 때문이랍니다. 보통 강유 피폐한 촉의 내정에는 관심 없이 무모한 북벌만 고집하던 과대망상증 환자로 평하죠. 어떤쪽의 평이 맞고 그르고 여기서 문제 아닙니다. 제가 주목하는 포인트는 우석훈은 책사를 꿈꾸고 있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책사는 제갈량이 아니라 이미 망한 나라를 지키며 전선을 꾸리는 책사이며 이는 구시대의 막내다운 정조입니다우리는 지는법이 없다면서 지는걸 전제하고 있다며 탓을 하는게 아니라 같이 눈물 한방울 흘릴 일입니다.

 

다음은 김규항.

필자는 김규항을 배운 건달이라고 칭하는데요하긴 그렇치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건달 맞아요하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에 반항하고 있는  같아 보이기는 하거든요.

 

 '건달' '아빠'라는  개의 페르소나를 손에  김규항은  한결 같았다. '건달' 자세로 엘리트와 평론가를 비판하고 혹은 아들과 대화하면서 '상식', 혹은 '어린이의 ' 찾아내 비판의 근거로 삼았을입니다.

 

3~40 남성특히 운동권 출신 남성의 죄의식은 건달이자 아빠인 김규항의 글이 먹혀드는 지점이랍니다그러나 자신이 염두에 두는 독자들 말고 다른 집단이 반응하기 시작하면그는 대체로 명징함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졌다더군요.

 

  무슨 문제든 계급의 문제를 지적하는 그를  '순혈의 기사'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뭐라고 그러든 그의 블로그에는 댓글을   없으며트위터는 몇번 끄적이다 접었습니다김규항은 자신이 발화하는 메시지가 의도 이상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며감당하지도 못하는  처럼 보입니다.

 

필자는 덧붙이지 않았지만 김규항이 발간하는 <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잡지도 사실 타겟은 3~40 지식인 부모입니다어린이가 아니라 부모.

 

이제 3명의 논객이 남았군요.

남은  분의 이름은 김어준홍세화고종석입니다.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이면서 음모론적 정치 선동가인 김어준에게는 지난 2012 너무 애썼고고맙다는  혹시 보게 된다면 전하고 싶고요그래도 졌으니이제는 흘러가는 꼴을 지켜보며 기대해 보는  밖에 없잖냐며 소주한잔 나누고 싶군요.

홍세화씨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어째선지 모두가 함께 이룬 성과는 항상 개인이 챙겨가더군요심노상회정찬이 떠난 자리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리에 오른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마지막 고종석 지켜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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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보르코시건 : 남자의 나라 아토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6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최세진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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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코시건 시리즈 6번째 이야기는 <남자의 나라 아토스>입니다. 참고로 마일즈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a
 
보르코시건 시리즈에서 보르코시건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다니 이거 참 놀라운 일이로군요. ㅎㅎ
 
로이스 맥마스터 브졸드는 자신이 창조한 우주의 일면을 채우는데 마일즈가 매번 필요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하긴 게이 행성이야기에 마일즈을 끼워 넣기에는 무리수가 많았겠지요. 나름 마초적인 주인공이라 이야기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문제는 보르코시건 없는 보르코시건 시리즈라는거겠죠.
 
마일즈의 나이가 아니라 출판년도로 보면 꽤 초기에 쓰여진 작품이라 어쩌면 <전사 견습>에서 이어지는 번외편으로써 작가에게는 시리즈의 향방을 탐색하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남자의 나라 아토스> 이후에 마일즈의 프리퀄이 나오고,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그 장대한 이야기들이 마일즈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 온 것으로 보면, 이 때 부졸드 여사가 삐끗했으면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뭔가 다른 이름이 붙어서 은하 공동체 이야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말입니다. ㅋㅋ
 
뭐 지난일에 가정이란 없겠지요.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마일즈의 이야기이고, <남자의 나라 아토스>는 그가 활약하는 세계의 한쪽면을 채우는 설정입니다. 로이스 맥마스터 브졸드가 즐기는 사고실험의 일부로써 말입니다.
 
그럼, 간략하게 소설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행성 아토스는 웜홀 막다른 곳에 있는 개척행성으로 200년 전에 정착이 시작된 젊은 행성입니다. 아토스의 창건의 아버지들은 만악의 근원인 여자 없이 행성사회를 구성하려고 했고, 그 뒷받침은 발전된 바이오 기술과 인공자궁이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200년이나 지나다 보니 X염색체를 제공하던 난소배양조직이 그 수명을 다한겁니다. 결국 인구 재생산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거요. 이대로라면 인구를 늘리기는 커녕 감소하다 스스로 사멸할 지경입니다.
 
에궁~
 
결국 누군가는 이 호모행성에서 나가서 난소배양조직을 사와야 한다는 겁니다. 통신판매는 이미 사기를 한번 당해 봤거든요.
 
중요한 물건은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에서 사야하는겁니더. 그건 30세기에도 진리예요.
 
휴~
 
^^;;;;
 
다음 줄거리는 책을 읽어보시고요.
꽤나 흥미진진하고, 여전히 명랑합니다.
어떤 무거운 주제라도 가볍게 배경처리해 주시는 작가의 능력 덕분에 사회의무금이랄지, 지정 대안부 제도 같은 어슐러 그륀 여사의 손에 떨어졌다면 겁나 무거운 질문 투성이의 이야기가 되었을 소재들이 또 다른 의미에서 겁나게 무심하고, 당연한듯이 배경처리됩니다.
 
게다가 사건의 핵심은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도약이랄지 진화랄지 아무튼 뭔가 결과를 알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지는건데..... "결과를 알 수 없으니, 그건 다음에." 뭐 이런 느낌으로 그냥 지나고, 발등의 불부터 꺼버리는군요.
 
작가의 이런 성향은 성격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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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엔진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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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칼지의 장점은 상호 이익이 충돌하는 집단 사이의 다툼을 현실감 있게 논리적으로 풀어 놓는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덤으로 스피디하기까지 하지요.
노인의 전쟁 시리즈에서 외계종족들이 그랬고요. 작은 친구들의 행성에서 기업과 보송이, 그리고 보송이의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다툼에는 상충되는 이익과 논리적인 해결 방법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속도에는 가르치려 들지 않고, 설명하려 들지 않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비밀이 있었고요. 게다가 이야기의 스피디한 진행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심각한 주제를 살짝 깔아 놓는 재주가 아주 탁월합니다. 마치 스님이 먹는 냉면가락 밑에 숨겨진 편육처럼 먹어야 할것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의뭉을 떠는 스킬을 탑재하고 있죠.
 
이번 소설 신엔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진 점은 상충되는 이익을 나누는 것도 차지하는 것도 신이라는 점이죠.
과학이 아닌 초자연적인 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은 마치 나폴레옹 시대의 함선을 보는 것 같고, 이 세계에서는 지극히 논리적인 이유로 신앙은 모든것의 근원이요 본질입니다.
 
설정은 이렇습니다.
 
기원전 신들의 싸움이 있었고, 하나의 신이 승리하여 다른 신들을 노예로 만듭니다. 노예가 된 신들은 행성간 우주선의 일부가 되어서 그들의 권능으로 우주선을 지탱하고, 행성간 장거리 여행의 동력이 됩니다. 한마디로 워프를 신의 권능으로 하는거죠.
 
^^a;;;;

그러다 보니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사람들의 신앙심이 된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겠죠. 이밖에 소소한 설정들은 중세 카톨릭에서 빌려 왔고요. 크툴루 신화도 약간 가미되어 있습니다. 
 
작동원리는 모르지만, 믿어야 기동이 가능한 우주선은 모르는까 의심하면 멈추는 이적입니다.
 
우주선은 종교입니다. 필요해서 믿으며 믿으니까 필요하지요. 
 
그럼, 당신이 믿는 신은 믿을 만한 신인가요? 라고 묻는 순간 당신은 차디찬 우주공간에 버려진 고기덩이가 되어 버릴텐데, 안 믿을 수 없겠지요. 논리적으로요.
그런데, 어떻게 세상일이 논리적으로만 풀리겠습니까? 아니, 소설의 논리에 입각해서라면 주인공이 원하지 않더라도 의심의 순간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풀릴테니까요.
 
그 뒷 얘기는 읽어 보시고요.
 
172쪽짜리 짧은 소설입니다. 단숨에 읽고 아쉬워 할 수도 있고, 이게 뭐여... 이 불신자 시키!라며 던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혹은 뻔한 종교SF라며 콧방귀 한번 뀌고, 잘난 척 한번하고, 존 스컬지를 불쌍히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당신이 책을 읽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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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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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나온 것이 1994년 이니까. 벌써 20년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사람도 책도 변하는게 당연하겠죠.
 
처음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책은 장정일의 독후감 모음이였습니다.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과 생각, 그리고 약간의 사족이 붙어있는 독서일기는 장정일의 독서량에 대한 질림과 질시를 느끼게 하는것과 동시에 장정일이 읽은 책에 대한 호기심도 같이 선사했었더랬습니다.
 
그후 장정일의 독서는 작가의 주요활동이 되었고, 그 활동의 결과는 공부라는 제목을 거쳐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 되었지요.
 
책 제목이 바뀌면서 형식도 변화합니다. 일기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읽은 날자와 함께 제시되던 장정일의 서지 목록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 되면서 주제에 따라 책을 묶어 소개하는 형식이 되었지요. 그리고 이번 3권에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날짜, 이슈에 어울리는 책이 소개되는 절충형이 되었습니다. 일기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주제별로 책을 소개하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뭐 그렇습니다. 요약하자면 사회적 이슈가 있고, 책이 있고, 장정일의 주장이 있습니다.
 
더 이상 작가의 독후감 모음이 아니라 저널에 실린 칼럼 모음집이 된것이지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모은 560쪽에 달하는 장정일의 주장은 경청할만 합니다. 다만 더 이상 텍스트 뒤에 숨지 않는 목소리는 모던의 포스트가 아니라 근대로 돌아간 계몽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주장은 시급하고, 결론은 확고합니다. 안타깝게도 소개한 책을 읽고 싶다는 호기심이 스며나올만한 틈새는 더 이상 없습니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통해 다른 책을 만나고, 다른 저자를 소개 받고 그들을 만나러 가는 출발점이 되는것이 아니라 장정일만을 만나고 온 기분입니다.
 
시대 탓일까요? 아니면 장정일이 변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건방져진 것일까요?
 
20년 세월의 변화는 확연한데, 호불호는 알 수 없습니다.
 
 
 
덧붙입니다.
 
목록에 '문학 작품'이 없습니다.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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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遊奇傳·大猿王 2 (ヤングジャンプコミックス·ウルトラ) (コミック)
테라다 카츠야 / 集英社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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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필력으로 보는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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