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죽음을 말하다
정동호 외 지음 / 산해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살고 싶다.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나는 살고 싶다, 더하여 영원히 살고 싶다. 나라는 주체성을 결코 잃지 않겠다.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죽을 것 같지가 않다. 나의 자의식은 내가 영원할 것이라고 속삭인다. 시간의 의미도 나 스스로에 의해 정해지니까, 내가 없으면 시간의 끝인 죽음도 의미가 없으므로,

그러나 나는 죽는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절대 명제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죽는다.

나는 나의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체험하는 동안은 살아 있는 것이고 죽으면 체험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에피쿨로스의 유명한 변증이다.

그래도 역시 나는 두렵다. 느낄 수 없고 결코 체험할 수 없더라도 죽음은 두렵다. 인식과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한다는 자체로 두려운 것이다.

내가 체험하는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다. 내가 받아들인 개념도 타인의 죽음에서 기인한다. 사랑하는 타인의 상실이 주체의 상실로 연역되어 두렵다.

철학은 끊임없이 죽는 연습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인간은 철학을 할 수밖에 없다. 죽음의 존재를 느끼는 한, 삶에도 그 그림자가 드리어진다. 삶의 이면은 죽음이다.

죽음을 삶에서 분리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에서 삶은 쉽게 분리가 된다. 삶과 죽음의 대결에서 언제나 죽음이 승리한다. 승리한 순간 죽음도 종말을 고한다.

여러 철학가들이 죽음에 대하여 고민했다. 삶의 공허한 적분인 죽음에서 튕겨져 돌아 오기도하고 추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죽음에 대한 강박증에 빠져 실존이라는 경직상태를 구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기의 주체적 동일성을 포기하고 우주의 거대한 호흡에 모든 것을 내주라고도 한다. 그러나 주체적 동일성을 포기한 자존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정말, 뫼비우스의 띠 같은 순환논리로만 인간은 죽음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가?

철학가는 소설가보다 정직하지 못하다. 허구를 허구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논리의 미로와 관념의 벽돌들로 높은 장벽을 쌓고 그 안에서 세상을 틈으로 내다본다. 그러며 자기 성의 끊임없는 보수공사로 평생을 소모한다.

그 성을 허물고 미로를 헤맨 후, 그들을 만나려고 하는 자는 다시 텅 빈 들판의 원점에 서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 때, 이미 그들은 도망가고 없다.

거대한 공허,

그 자리에서 놀람과 두려움에 휘둥그래진 눈으로 서둘러 자기의 성을 쌓기 시작한다. 아니 쌓아야 한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에 대하여 이러한 체험을 하기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단 이 책이 무슨 해결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마시라.

소크라테스, 플라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레비나스, 들뢰즈, 장자, 공자 같은 머리 좋은 사람들도 결국 죽음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너털웃음 한 번 지으면 이 책을 읽는 의미는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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