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서 온 편지 - 제22회 전태일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하명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그 변화가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장담할 수 없었다. 도은도 마찬가지였다. 도은의 어머니는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 도은은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고 가난했다. 그녀의 변화는 마을에 있었던 큰 바위가 사라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태풍에 관해 이야기했고 고층 아파트의 피해와 교회의 첨탑이 무너졌고 정돈된 외벽이 떨어져 나가 스티로폼이 떨어졌다며 부실 공사와 안전 불감증에 대해 말하는 뉴스를 보며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는 도은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동네인 판자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곳에 사는 우리의 안전은 보도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라며 한숨 쉬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방학식 날 담임선생님의 ‘교사는 노동자인가?’란 질문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내가 느꼈던 도은은 판잣집에 살면서 의지할 때라고는 할머니뿐이었고 살아내기도 벅찼다. 그것을 보고 불의가 뭔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지향점이 정해진 것 같았다.

이것은 제3차 국민대회 현장에서 백골단원의 도은에게 복창하게 한 말이다. 이 구절을 읽는데, 문득 ’국가의 권력’이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존중받지 못하는…. 어떻게 이런 국가에서 사람들이 살게 된 걸까?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도 없는 이 시대는 일제강점기의 연장선이었다. 이 시대에 태어났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태어났지만 힘이 되지 못해 슬퍼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약칭)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교사들의 단체인 줄로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동적이다’ 라는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은 이 소설을 읽으며 깨졌다.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교육이, 인권이 전교조가 내세우는 가치였다.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글쓰기 수업에서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 고등학생 소녀의 성장소설’인가. ‘한 여고생의 눈에 비친 사회를 고발하는 소설’인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겪어 본 상황도 아니기에 소설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본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는 개인의 개성이 억압받으며 의견을 말하면 패륜아로 불리는 폭력이 만연한 사회, 그것을 외면한 언론. 바뀌길 바라지만 살기 위해 외치며 참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도망처여야 하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솔직히 이 소설을 읽으며 한없이 창피했고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면서 책을 멀리했고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룬 소설을 읽어보기를 꺼렸다. 이런 주제의 소설도 읽어야 내 소설의 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고, 내면의 가치관 역시 정해볼 수 있을 텐데…….

“상대방의 주장을 동의할 수 없더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강론 시간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읽으며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약칭)의 모습과 주장을 완전히 동의한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읽었던 하명희 작가의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는 두려움 많고 생각이 좁은 나에게 영역을 확장해준 고마운 소설이 분명하다.


바위가 사라졌을 뿐인데, <중략> 바위는 바위가 아닌 것들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 P8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국가의 쓰레기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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