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 지음, 말로타 그림, 최이슬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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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 뿐 아니라 이 책과 같은 결의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도 달 수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이때의 결이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내 의견이란 나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행동원칙과 같은 것이다페미니즘에 관한 더 많은 주체의 더 많은 이야기가 얽히고 섥혀야 한다는 의견 역시 동의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페미니즘이 태동할 수 밖에 없는 가부장적 환경 속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지내오면서 알게 모르게 기득권을 누려온 입장에서, 이를 원래 그러했어야 했을 모습으로 돌리려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시도에 어떤 언어를 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멸이고 권한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관련한 나의 일련의 의견들은 어떠한 부름에 응답하는 식으로만 발화될 수 있고,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을 나에게 응답을 촉구하는 또 하나의 부름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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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카르멘 G.데 라 쿠에바는 직접적으로 나를 부르지 않는다. 이 책이 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나의 착각이기도 하다. 카르멘은 여성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인다. 여성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를 묻는다. 루이자 메이 올컷,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이브 엔슬러와 에밀리 디킨슨, 아니 에르노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세계를 방대하고 탄탄하게 만들어준 이야기꾼들과 그들이 자신과 어떻게 만났는지, 그들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그러나 이야기가 풀려나갈 때 조이스 존슨과 에이드리언 리치를 모르더라도 여성 독자는 카르멘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카르멘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고, 그 책의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좋았고 하는 독서평론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의 선조부터(그리고 독자의 선조부터) 그녀(독자)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반복되고 깨어지지 않던 여성혐오적 사회 시스템을 고발하고 작가들이 어떻게 그녀가 가부장적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이라는 이름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줬는지를 풀어낸다. 놀라울 것도 없지만 그 시스템이란 것은 지겹게도 단순하고 강력한 것이어서 카르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데 지역적, 시대적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더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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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문제, 특히 사회적인 부분에서 기존의 질서에 맞서고 새로운 시스템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그렇지만 인류는 몇번이고 시스템을 바꿔왔고 그 기저에는 연대의 힘이 있었다.

오늘날 여성들의 연대는 어떠한가.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연대에 대한 감각이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단순히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연대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만큼 가부장제의 뿌리는 깊고, 남성 권력의 벽은 견고하다. 이를 다시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발자국 더 나아간 연대가 필요하다. 새로운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온라인망이고 개별적으로는 독서를 통한 가상의 연대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좋은 책이 나오고 읽히는 과정에도 자본의 논리가 침범한 이 시대에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여성 작가의 책을 많이 읽고 더 많은, 더 좋은 작가들이 여성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 책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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