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계몽 - 이성, 과학, 휴머니즘, 그리고 진보를 말하다 사이언스 클래식 37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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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세계적 '석학'들의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화제를 모은 EBS의 <위대한 수업>에 스티븐 핑커가 '팩트 폭격'이라는 이름의 강의로 출연했다. '팩트 폭격'이라는 이름이 공영교육방송의 표현 치고는 퍽 상스럽게 느껴지지만, 역설적으로, 강연을 통해 그가 홍보한, 최근 번역된 그의 저작 «지금 다시 계몽»의 부박함과 잘 조응하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계몽»은 «팩트풀니스»와 함께, '신낙관주의(New Optimism)'라는 하나의 담론적 경향을 대표하는 저서다. 스티븐 핑커, 한스 로슬링, 요한 노르베리, 맷 리들리... 이 '신낙관주의자'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지향이 있다면, '팩트'를 통해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주의'를 증명해보이려는 시도다. '신낙관주의'는, 그 자신이 표방하는 것('팩트', '이성', '과학'...)과 달리, 매우 분명히 이념적인 사조다. '신낙관주의' 흐름에 대한 기획기사에서 «가디언» 지의 기자 올리버 버크만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 삶의 고통이 수백년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 신낙관주의자들의 본질적 관심은 아니다. ...몇 가지 더 논쟁적인 함의들이 있다. ...(비록 신낙관주의자들의 저술에 항상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지난 수십년 간 해온 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분명히 잘 기능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끌고 온 정치·경제 질서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Burkeman, 2017).” 이 함의를, 조금 더 노골적으로 전개시켜보면 이렇다: "불평등이니 기아니 기후변화니 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이 뒤집혀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껏 해온 대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계몽»과 ‘신낙관주의’의 논리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사실’로 유포해온 ‘팩트’들을 그 의미구조 속에서 재조명해 검토하는 매우 피곤한 작업이 필요하다. '신낙관주의'의 담론 구조가 빈곤, 불평등, 민주주의 등 사회 발전의 핵심적인 영역들에 걸쳐 있기 때문에라도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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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팩트를 인식 주체의 주관에 대해 독립인 존재론적 사태 즈음으로 이해하는 버릇이 있지만, 정작 그 라틴어 어원인 '팍툼(factum)'에는 '만들어진 것(제품; the product)'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실, 스티븐 핑커가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인간이 제작한 개념적 구성물에 기초한 인위적 '팍툼'이다. 가령, 빈곤은 줄어들고 있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며, 사회는 더 민주적으로 변한다는 그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려 들면, 당장에 '빈곤'과 '평화', '민주' 따위의, 인류가 고안해낸 추상적 개념들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부상한다. 사회과학자들은 주로 조작화를 통해 이 구성개념들을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다시 정의하여 연구에 사용한다. 그래서, 항상 이 사회과학 연구들에서는 과연 측정하고 있는 현상이 우리가 애초에 연구하고자 했던 그 개념과 얼마나 정확히 대응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방법론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빈곤은 줄어들었다느니, 사회가 더 민주적으로 변한다느니 하는 '팩트'들은 이 조작적 정의의 제약 아래에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스티븐 핑커의 '팩트'에서 생략된 건 바로 이런 사실관계다.

 예컨대, 세계화에 의해 '기본적 욕구'조차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인 '극단적 빈곤'이 눈부신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는 스티븐 핑커는, 이 '극단적 빈곤'의 조작적 정의에 쓰이는 PPP(구매력평가)의 개념이나, CPI(소비자물가지수) 등, '극단적 빈곤'의 구성개념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쟁점들을 실상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극단적 빈곤' 통계를 생성하는 세계은행은, 전세계 서로 다른 나라들에 걸쳐 '달러'라는 통일적인 단위로 빈곤을 측정하기 위해 각국의 법정통화와 달러를 서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물가의 차이에 따른 구매력 차이를 보정하려는 목적으로 '구매력평가지수'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구매력평가지수'의 환산 비율이 '기본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긴요한 재화들의 가격 비율이 아니라, 전체 인구가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재화 및 용역 집합의 각 품목들의 가격비를 집계함으로써 산출된다는 사실은, 세계은행 빈곤 측정의 타당도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한계로 지적받아 왔다. 
 즉, '극단적 빈곤'을 측정하는 본디의 목적을 만족시키려면, 인구의 일반적인 소비 성향을 반영하는 재화 및 용역 집합에 대한 구매력이 아니라, 이런 '기본적 욕구'의 충족과 직결되는 재화에 대한 구매력을 측정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은행처럼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달러로 환산하기 위해 일반 구매력평가지수를 적용하면, 그 나라들에서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재화를 빈곤선 수준만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가 얼마인지가 아니라, 인구의 평균적인 소비 품목을 그만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게 되는 셈이다. 
 이와는 달리, 구체적인 물질적 후생 수준(권장 식이 허용량)을 기준으로 빈곤선을 설정하고, PPP 지수의 바스켓도 그 구성개념(‘권장 식이 허용량’)과 일관되게 식품들로 구성해 식량 차원의 빈곤을 측정한 한 연구는,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극단적 빈곤')이 그리는 것과는 사뭇 달리,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들이 추진한 '세계화'가 가장 급진적으로 전개되던 8-90년대에 오히려 빈곤의 개선이 정체하거나, 혹은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는 결과를 보여준다(더 자세한 논의는 «지금 다시 계몽» 비판: '빈곤'의 팩트, 혹은 팍툼 참고).


 '빈곤'의 측정과 관련해 위에 기술한 문제들이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이슈들이라, 참조할 여유가 없었다고 선해해볼 수 있다. 스티븐 핑커는 이런 비판에 대해서 무어라고 생각할까?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을 통해 게재된 세계은행의 빈곤 통계에 대한 한 비판 칼럼을 두고 핑커가 남긴 반응을 보면, 대략 '빈곤이 줄어든다는 팩트를 부정하다니, 극좌 맑시스트 이데올로그가 틀림없군!' 정도인 것 같다. 진지한 학술적 논의들을 균형감 있게 면밀히 검토하기 보다, 개중에 가장 '정치적'인 반응들을 콕 찝어 이념적으로 비방하는 식이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공공 담론의 '탈정치화'를 역설하는 인물치고는 굉장히 정치적인 대응이지 않은가? 


 번역판으로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책에서 이런 사례들을 또 찾아내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가령, 그가 역시 논쟁적 저작이었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부터 뚝심있게 주장해온 '인류는 평화로워지고 있다'는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금 다시 계몽»은 세 개의 그래프를 게재한다. 그 중 첫번째 그래프는 1500년 이후 열강 사이의 전쟁 햇수 비율('그림 11.1', p.249)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도 스티븐 핑커는 ‘열강 사이의 전쟁 햇수 비율’이 감소한다는 기술적 사실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맥락을 누락하고 있다. 이 첫번째 그래프가 그려진 기간 동안 "열강 사이의 전쟁”은 줄어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동시에, 분쟁의 일반적인 양상이 변해왔다. 즉 분쟁의 일반적 성격이 '열강 사이의 전쟁'으로부터 식민지 정복과 내전, 학살 따위로 옮겨져왔다는 중요한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전쟁이 감소"한다며 '평화'의 추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의미를 크게 오도할 수 있다. '전쟁 햇수'라는 단위도 문제적이다. 같은 기간 동안 인류가 발휘할 수 있는 살상력 역시 증가해왔다는 사실관계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종합적인 추이를 파악하려면 최소한, 17세기 열강 간 전쟁과 식민지 정복, 20세기의 내전 등, 살상력의 차이가 큰 서로 다른 형태의 분쟁들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단위로 그 수를 파악해야 한다. 그럼, 스티븐 핑커는 이런 점을 몰랐을까? 스티븐 핑커는 불과 몇 페이지 뒤에서 이런 성격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다. 즉 전쟁의 희생자 수 통계다('그림 11.2', p.252). 단, 이번에는 그래프가 1500년이 아니라 1946년부터 시작한다. 그래프에 의하면, 1946년 이후 전투 사망자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 그럼, 1945년 이전에는 비슷한 통계 자료가 없었던 걸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핑커가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전투의 직접 사망자만을 집계하지만, 간접 사망자까지 포함해 그보다 더 긴 시계열을 형성하고 있는 자료가 있다. 핑커가 책의 2부 전반에 걸쳐서 인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그래프가 ‘Our World In Data’라는 웹사이트에 정리되어 있는 자료들로 그려진 것인데, 이 웹사이트에서는 1400년 이후의 분쟁의 직간접 사망자 통계 역시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그려진 그래프의 추세선은, 분쟁 사망자가 1400년 이후 장기적으로 증가 추세를 그린다는 걸 보여준다(참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있을까). 핑커가 인용하는 전투 사망자 수의 감소세가 시작하는 1945년 이후의 경향이, 이런 수백년의 장기 추세를 반전시킬 수 있을지는, 적어도 이 그래프에서는 파악할 수 없다. 스티븐 핑커 본인이 언급하듯, 항상 큰 전쟁들 사이에는 평화적 휴식기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1945년 이전 전쟁 사이의 이 휴지기들과 그 이후 '장기 평화' 사이에 차별적인 특징이 있다면, 1945년 이후에는 훨씬 많은 나라들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인데, 스티븐 핑커는 이 민주주의의 확산을 다루는 챕터에서도 역시 사실관계를 오도할 수 있는 그래프로 그의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위대한 수업>에서는 아예 “지난 10년 대비 가장 높은 민주주의 지수를 기록”하고 있다며 인용하는 이 그래프는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지수를 바탕으로 한 '민주정 대 전제정' 점수의 시계열을 그린 그래프다.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지수가 최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받는 헝가리나 폴란드 등의 나라들에게 프랑스, 한국, 미국보다 높은 10점 만점을 주는 지수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민주정 대 전제정' 점수가 인구가 아니라 국가를 단위로 산출된 점수라는 점은,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는 핑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큰 결함이다. 핑커가 인용한 그래프의 논리대로라면, 14억 중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과 8천만 이란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똑같은 수준의 변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다양성(V-Dem) 연구소의 ‘자유민주주의’ 지수에 인구 가중치를 주어 한 나라의 점수 변화가 그 인구 수에 상응하는만큼 지수의 변화에 기여하도록 한 그래프에 따르면, 세계의 자유민주주의는 2000년대 이후 정체하다가 2010년대에 접어들어 1990년 즈음의 수준으로 회귀하고 있다(참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있을까).


 더 큰 엉성함은 스티븐 핑커가 '팩트'라고 제시하는 모든 진보의 배후에 있는 '계몽주의'의 개념에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성사를 연구하는 여러 역사학자들이 스티븐 핑커의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가 엉성하다는 서평들(Bell, 2018Gray, 2018Riskin, 2019)을 남겨왔지만, 이런 지적에 대한 핑커의 대답은 이렇다: 


'계몽주의'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고른 이유는, 그것이 내가 옹호하려는 이상을 더 캐치하게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계몽»은 지성사 연구가 아니다. 그 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그 이상에 똑같이 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단어를 두고 트집잡는 건 무의미하다. ...'계몽주의'는 관습적으로 인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사용하는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핑커가 말하는 '계몽주의'는 그 정의 상, 실제 계몽 시대의 사상가들에게 보편적 지지를 얻은 이념이 아니라, 저자 본인이 지지하는 이성적·과학적 이상일 뿐이라는 것. 이건 그야말로 무적의 정의다. 계몽주의의 모든 나쁜 것은 그저 간편하게 이성과 과학의 '잘못된' 사용, 오용이었다고 말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몽이 아니다!"


 그래서 «계몽»은, 저자 본인이 쉽게 인정해버린 것처럼 '계몽주의'에 대한 학술적 정의에 기초한 지성사적 작업이 아니라, 저자의 조야한 이해로 키치하게 정의한 용어를 제재로 한 인상비평집에 가깝다. 그가 '계몽'의 핵심 정신이라고 꼽는 '이성', '과학', '인본주의'를 다루는 마지막 세 챕터도 계몽주의에 대한 지성사적 연구와는 거의 무관한 그의 시사 비평이다. 핑커식 '계몽주의'의 느슨한 정의는 너무 쉽고 간편하게 저자의 정치적 입맛에 맞게 확장된다. 계몽주의란 '휴머니즘'이고 '열린 사회'이며, '코스모폴리타니즘'이고 '고전적 자유주의'다(«계몽», p.21).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곧 ‘계몽’ 정신의 구현이고,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곧 ‘계몽’ 정신의 구현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계몽주의는 결코 그렇게 간편하게 요약되는 일관된 이상적 이념이 아니라, 굉장히 다원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이었다고 입을 모으며, 특히 조나단 이스라엘과 같은 학자에 의하면, 핑커가 옹호하는 근대 세계의 중추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권,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교분리의 이상을 정초하는 데 사상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주역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경제 이념과 친했던 계몽 사상의 온건파가 아니라, 계몽 사상의 "급진적" 분파였다(참고: «지금 다시 계몽» : "그것은 계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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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스티븐 핑커가 인용하는 어떤 '팩트'들은, 과연 팩트다. 가령, 오늘날과 과거의 어떤 임의의 한 시점만을 두고 단순히 비교해보면,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그의 주장은 사실이다. 기대수명 역시 100여년 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데이터와 팩트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도, 실은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 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스티븐 핑커나 혹은 일각의 몇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 이해관심과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그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는 셈이다. 스티븐 핑커 식의 '신낙관주의'와 팩트 물신주의가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된다는 순진한 몇 ‘신낙관주의자’들의 어렴풋한 바람과는 달리, 어떤 데이터도 그 스스로 혼자 말하지는 않는다. 빈곤, 평화,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팩트’에는 항상 '신낙관주의자'들의 해석의 층위가 있었다. ‘신낙관주의’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적·원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빈곤과 건강, 수명, 교육, 행복, 평화와 민주주의 등, 사회 지표들의 ‘진보’에 관심이 있다면, 거듭, ‘신낙관주의’ 일각의 물신적 팩트주의가 질식시킨 사실관계의 함의를 복원하고, ‘신낙관주의’의 정치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동시에 '팩폭', '팩트폭격'의 오락이 지배하는 담론장에서, 사실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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