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 - 미국 최고 발레단 ABT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이야기
미스티 코플랜드 지음, 이현숙 옮김 / 동글디자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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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온몸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아주아주 가까이에서 봤다. '비 오듯'보다 마치 몸 전체에 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때 그 발레리나에게서 느낀 열정에 소름이 돋았었다. 아직도 그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어릴 때 2년 정도 발레를 했었다. 공연도 하고 콩쿠르도 나갔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었다. 커가면서 했던 생각이 있다. "나중에 어른 되면 다시 발레 해야지!"

입사한지 1년쯤 지났을 때 이렇게 일만 하다간 제 명에 못 죽겠다 싶었다. 운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 발레가 생각났다. 어릴 때의 로망을 이루게 된 셈이었다! 그때 만난 선생님께 벌써 만 4년째 배우고 있다.

발레는 매번 새롭고 재밌다. 어떤 면에서 레고와 닮았다.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쪼개진 동작 하나가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두 발로 서기만 해도 땀이 났다가 까치발로 서고, 턴을 돌고, 점프를 하고, 토슈즈를 신게 될 때의 희열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발레 공연은 더더더 재밌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발레는 진입 장벽이 높다. 공연 관람이나 실제 배우는 건 고상하고 어렵고 비싼 취미라고 생각하기 쉽다. 때로 유연하지 않아서, 마르지 않아서, 예쁘지 않아서 배우지 못한다는 말도 들어봤다.

만약 내가 어릴 때 뭣도 모르고 발레를 배우지 않았다면, 크리스마스 때 엄마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 같은 책이 반갑다. 한 번이라도 접해본 것은 더 이상 아주 멀리 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 손에 잡힐 수 있는 존재가 되곤 하니까. 특히나 이 책은 발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발레'가 들어갈 자리에 자신의 어떤 것을 넣어도 말이 된다.

내가 ㅇㅇ을 하는 이유

내가 ㅇㅇ을 사랑하는 이유

내가 ㅇㅇ에 몰두하는 이유

내가 될 때까지 반복하는 ㅇㅇ

책 <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 서평단을 신청한 계기는 단순했다. "나는 발레를 좋아하는 취발러(취미발레러)이니까."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점점 '내가 발레를 왜 좋아했더라?'를 생각하게 되었고, 발레의 자리에 여러 단어들을 넣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일을 넣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넣고 싶은 단어를 묻기도 했다.

미스티 코플랜드는 그 보수적인 발레계에서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가 된다. 그것도 아메리칸발레시어터에서 말이다. 미스티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마주했던 나의 마이너리티나 차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칭찬이라고 던진 상대방의 말들에 상처 입었던 기억들도 함께 떠올랐다. 내가 예민한 탓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피해의식인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했던 말들도.

책 <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는 아주 쉽게 술술 잘 읽힌다. 문체나 이야기의 흐름이 아주 매끄럽다. 그러나 나의 경험과 생각을 끊임없이 끌어올려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어려웠다. 미스티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 생각해 보게 하는 것. 이것이 이 책의 힘이 아닐까 한다.

봇물 터지듯 밀려왔던 기억들 끝에 또 다른 미스티인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맞서 싸웠든, 그저 지나가기를 바라며 숨을 죽였든 잘 지나왔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하게 잘 지켜내왔어.

사랑하는 걸 찾기 위해 노력했고,

사랑을 퍼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잖아.

나는 영원히 온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마치 나의 마지막 공연인 듯이.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사랑할 것이다.

<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 미스티 코플랜드 지음, 이현숙 옮김, 동글디자인 출판, 3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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