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깊이 믿는다. 피를 묻힌 손을 일시적으로 감출 수 있으나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는 것을."
- P20

전당강
I전체 길이는 494km이다. 이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는 커다란 나팔 모양이 나타나는데, 이때 생기는 전당조錢塘朝 라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바닷물이 거꾸로 강 입구로 밀려들면서 강물과 서로 부딪치는데, 이때 으르렁대는 물소리가 마치 하늘과 땅을 찢고 가를 듯이 엄청나다. 하지만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전당조는 음력 8월 15일에 최고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이때가 되면 수십만 군중이 모여들어 해안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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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나무를 삶아 종이가 나오기까지 사람의 손이 99번, 마지막으로 종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한 번 더 만져서 ‘백지(紙)‘라고 합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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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인 양 포장되지만 난 차츰, 실은 우리가 가장간절히 원하는 것이야말로 혼돈이라고 믿게 됐다.  - P14

삶은 허물리고 무너진다. 우리는 와해되는 삶을 지키려 뭐든 손 닿는 대로 부여잡는다. 그러다 깨닫는다. 그 삶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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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팅과 시장의 의미, 작품을 재발견하는 눈, 예술 작품이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을 소중히 되새기는 일이다. 자본과 예술을 떼어 놓을 수 없다면,
중요한 것은 결국 판단력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누구도 정보를 받아들이지 말라거나 디지털 플랫폼을 멀리하라고 권유하진 않는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디지털 문해력(Digital Literacy)이듯, 현대의 미술계, 그리고 미술시장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미술 문해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격으로만 매긴 순위가 예술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말이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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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생활

이민하

모자가 머리 위에서 날아갔습니다 새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물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젖은 모자를 쓰고
나는 물가에 앉았습니다
아무도 모자를 벗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축축하고 녹슨 기계음이 수평선에서 돌아옵니다 막 찍어낸 파도처럼

나는 수인 옆에 누웠습니다
누군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몸을 떨면서
수인도 수인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 P163

빛을 세워도 좋을까

이수명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에 갇힌 것 같고 밤에 누우면 밤에 갇힌 것 같다.

백사장에 다시 가고 싶다. 백사장에서 다시 모래를 파고 싶다.

모래를 파고 흙을 파고 흙을 뒤집고 모래를 손에 얹고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들지도 모른다. 흙을 파다가 모래 속에 파묻힐지도 모른다.

아니 모래 속에 이미 들어있는 누군가를 불현듯 발견할지 모른다.
모래 속에 누워 있는 사람 모래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아마 피로를 푸는 것이라고 피로가 쌓인 것이라고
그래도 그는 너무 가볍다.

그를 빛에 비춰본다. 잠깐 같이 있는다. 그에게 빛을 세워도 좋을까
똑바로 세워 놓아도 좋을까

그는 가볍다. 그를 모래 속에 남겨두고 떠난다. 백사장을 떠난다.
백사장에 다시 가고 싶다. 무얼 해도 피로를 풀 수가 없다. 피로가 쌓인것이라고

햇살이 뜨거워진다. 햇살에 갇힌 것 같고

모래를 털며 모래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을 본다.
- P179

정우신
‘홍콩 정원외

움직이는 것은 슬픈가.
차가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가.

발목은 눈보라와 함께 증발해버린 청춘, 다리를 절룩이며 파이프를 옮겼다.
눈을 쓸고 뒤를 돌아보면 다시 눈 속에 파묻힌 다리. 자라고 있을까.

달팽이가, 어느 날 아침 운동화 앞으로 갑자기 떨어진 달팽이가 레일 위를기어가고 있다.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을까. 다락방에서 반찬을 몰래 집어먹다.
잠든 소년의 꿈속으로 덧댄 금속이 닳아서 살을 드러내는 현실의 기분으로

월급을 전부 부쳤다. 온종일 걸었다. 산책을 하는 신의 풍경, 움직이는 생물이없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없다. 공장으로 돌아와 무릎 크기의 눈덩이를 몇 개만들다가 잠에 든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슬픈가.
가만히 있는 식물은 왜 움직이는가.

밤이, 어느 작은 마을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밤이 등 위에 정적을 올려놓고
천천히 기어간다. 플랫폼으로, 플랫폼으로, 나를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것. 창밖으로 내리는 눈발의 패턴이 바뀐다.
간혹 달팽이 위로 바퀴가 지나가면 슬프다고 말했다.

잠들어 있는 마음이 부풀고 있다.

나를 민다.
나를 민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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