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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나운 애착 ㅣ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월
평점 :
타인의 디테일이 주문을 걸다
작가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삶의 이야기와 그녀를 구석구석 채우고 있는 그녀와 함께 살았던 여자와 남자들. 그녀가 겪는 경험들과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상황들. 특히 작가의 엄마와 작가 자신의 관계. 그 무엇도 나와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들이 사는 나라, 지역, 집, 이웃들 등등 참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수많은 차이점을 꾹꾹 다지듯 누르고 힘있게 뚫고 나오는 나만의 기억들.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쏙 빼닮아 있는기억들과 기분들. 작가의 이야기는 작가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나만의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작가가 작품 속에 그려낸 다양한 사물들과 날씨와 감정과 대화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주문이 되어 나와 나의 엄마의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기억들을 불러냈다. 그렇게 작가와 나는 부드럽게 이어졌고, 작가가 엄마와 살면서 느낀 모든 생각과 감정과 기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엄마와 함께 한 그 모든 생각과 감정과 기분도 아주 강력한 이야기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 어떤 보잘 것 없는 ,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엄마와 딸의 사연이라도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같은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주문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음껏 화내도 좋아
딸은 대체로 다른 가족 구성원들보다 더 많은 경우 엄마의 뒷모습을 애달프게 떠올린다.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아들이나 남편보다 딸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기억한다. 나처럼 살까봐. 바깥에서 겪을 많은 억울함을 예상하며 딸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본다. 딸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매일매일 해치워야 할 가사일의 무게를 상상하며 엄마의 뒷모습의 무게에 같이 주저앉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엄마와 딸은, 서로의 욕망이
부서지고 해체되는 모습을 목격했고 목격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욕망을 고백하며 화내고 분노한다. 작가와 작가의 엄마처럼, 나와 나의 엄마도 그랬고 지금도 우리는 서로에게 화를 내고 또 받아낸다. 끊임없이 다투고 욕심을 말하고 억울해하고, 고집 부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여자와 엄마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마음껏 화낼 수 있는 서로가 있음에 안도하고 토닥인다. 서로가 서로의 오래된 욕망과 상처를 오래 목격한 사이. 작가와 작가의 엄마처럼, 나와 엄마처럼 많은 엄마와 딸은 마음껏 화낼 엄마가 있음을 딸이 있음에 안도하며 안전함을 느낀다. 책 속의 그토록 많은 말싸움들, 내용은 다르지만 많이도 닮은 말싸움들. 이 세상 엄마와 딸들은 서로에게 화를 내며 서로의 욕망을 인정하고 발견하고 애태운다.
기억나니?
작가가 엄마와 함께 옛날 사진을 보며 그때 그 시절로 함께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만은 아주 친숙했다. 기억나니? 여기 어딘지 기억나니? 이날 기억나니? 누군지 기억나니?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고집 부리기도 하는 가장 평온한 짧은 평화의 시간.
나의 엄마가 기억하는 나와 함께 한 기억들. 내가 모르는 엄마의 시간들. 나이가 들수록 엄마에게 질문이 많아진다. 어릴 때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엄마의 과거들. 엄마의 욕망들과 꿈. 펼쳐보지 못한 그녀의 시간들. 나와 완벽하게 겹쳐지는 억울함. 작가와 작가의 엄마처럼 나와 나의 엄마는 함께 억울해 하고 함께 서글퍼하며 함께 분노한다. 우리는 패잔병의 아픔을 같이 나누며 서로를 위로한다..
이제 엄마도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 피할 수 없는 관계인 나와 엄마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같이 걸어가고 있다. 나의 엄마와 나의 관계는 컵에 가득차 찰랑거리는 물처럼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관계지만,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관계다. 책을 읽으며 나와 나의 엄마는 한 편의 근사한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