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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셔넬라 Passionella
줄스 파이퍼 글.그림, 구자명 옮김 / 이숲 / 200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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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렸다. 대표작은 물론, 패셔넬라와 먼로 이야기겠지만, 대사 없이 그림으로만 남녀관계를 절묘하게 풀어낸 '관계'도 그렇고, '이기는 것보다는 비기는 것이 진정한 도전'이라는 해롤드 스워그도 그렇고, 한편 한편 버릴 것이 없다.

그중에서 ‘외로운 기계 Lonely machine'라는 단편은 시사하는 바가 간단치 않다. 월터 페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배반하고, 해코지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엄마마저도 자기를 귀찮아하는 것 같아서 상처를 많이 받은 인물이다. 상처가 분노로 변한 어느 날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오직 자기만 사랑해주고, 항상 자기 곁에 있으며, 자기가 어떤 변덕을 부려도 모두 받아주는 ‘기계’를 만들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결국, 기계와 함께 살기 시작한 월터 페이는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기계는 그에게 엄마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아내가 되었다. 월터는 열등감도 사라지고, 사교생활도 원활해졌으며,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도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월터는 점점 기계가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 동거를 시작하면서 월터는 기계를 벽장 속에 처박아 버린다. 제작할 때부터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기계는 월터에게 말한다. “나는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월터. 당신 좋을 대로 하세요.” 동거하는 여자 몰래 가끔 벽장문을 열고 기계에게 안부를 묻는 월터의 죄의식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월터 페이를 보면서 그동안 직장에서 만났던 성격이상자들이 떠올랐다. 인정받고, 인기를 얻고, 주목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렬하다 보니, 항상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고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어 괴로워하다가 앙심을 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머릿속에서 드라마를 만든다. 저 선배는 나를 미워하는 게 분명해. 저 상사는 내게 편견이 있어. 저 후배는 자꾸 나를 따돌리는 것 같아. 부서에서 혹시 나를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닐까... 

만화를 보면 월터 페이의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그를 따돌린다기보다는 스스로 따돌림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절망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결국, 라캉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없는 것’을 욕망하게 마련이다. 절망이 큰 것은 그만큼 욕망도 크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성격이상자들은 늘 지독한 결핍감에 시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을 손에 넣으면(아무리 별 볼일 없는 권력이라도)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값을 떨었다. 권한을 과시하고, 그동안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사람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싸구려 관대함을 보이며 으스댔다. 욕망과 그 대상 사이에 설치된 덫에 걸린 채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들 때까지 눈에 보이는 세상을 그렇게 빼앗거나 빼앗기거나, 누르거나 눌리거나, 올라가거나 쫓겨간다는 식의 흑백논리로만 바라보면서 구석구석에 음모론을 적용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러니까, 단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며 그 본질을 생각해 본다거나, 상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복잡한 드라마에 강제 출연하여 별의별 연기를 다 하더라는 것이다. 
  

월터 페이가 만든 기계의 이름이 ‘외로운 기계’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월터 페이는 자신이 외로워서 기계를 만들었으나 결국 그는 기계를 외롭게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기계는 월터의 욕망 그 자체를 상징한다. 욕망과 그 욕망의 대상이 한 집에서 동거하는 한, 인간에게 평화는 없다. 외로운 기계를 벽장 속에 처넣고서도, 동거녀가 집에 없을 때 몰래 벽장문을 열고 기계와 밀회하는 월터처럼, 인간은 욕망에 약한 동물이다. 

나는 욕망의 덫에 걸린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조금 어렵겠지만, 조금 떨어져서 '외로운 기계'를 바라보라고. 그리고 마치 감춰야 할 시체처럼 욕망을 벽장 속에 넣어둘 것이 아니라, 해체하여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가게 내버려 두라고. 그리고 닦달하는 욕망을 정 견딜 수 없다면 씩씩하게 집 밖으로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말라고. 밖으로 나오면 햇살이 밝고 공기가 맑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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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2009-03-3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멋진 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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