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강독 1 정신현상학 강독 1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전대호 지음, 전대호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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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권도대체언제나오나요오로오옹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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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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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그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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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inite Jest (Paperback)
Wallace, David Foster / Back Bay Books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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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그냥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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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정치학 - 세미나 11 강해
백상현 지음 / 에디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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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문제는 이 책이 후기 라캉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언급되는 (자크 알랭 밀레가 촌스럽다고까지 묘사하는) 초기 라캉의 임상으로부터도 내가 깨달은 점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초기 라캉의 임상은 환자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끌어내리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민승기 교수가 지젝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스쳐지나가는 말로 자기가 대학원 다닐 때만 해도 포크너 소설을 분석한다 치면 어떤 인물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것이 정신분석 비평의 다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내려온다는 것은 이미지의 세계에서 언어의 세계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몇년 간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 어떤 관념이나 기억들은 대부분 이미지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지는 자신을 부풀리는 것을 잘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더 위험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줄 안다. 특히 나의 정신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을 때 (가령 새벽 3시?) 이미지는 내 존재를 집어삼킬만큼 커다란 형태로 나타나고 나는 꼼짝없이 속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속을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이미지가 품고 있는 위협의 요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봐도 매우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데에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슷한 위협이 더 커다란 스케일로 (가령 사회적 스케일) 커질 경우 범죄로 판단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스케일' 부분이다. 위협의 논리적 타당성에만 주목한 탓에 그 일의 스케일이 내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그동안 계속해서 놓쳐 왔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모든 것이 이미지의 세계, 상상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도, 그 대상도, 모두 이미지로 참여하는 그곳에선 각자의 크기가 풍선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러다 보면 자아의 크기가 대상의 크기에 짓눌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주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상징계로 내려올 경우 여러개의 이점이 있다. 우선 언어가 구성하고 있는 총체적인 질서 안에는 모든 사물이 자기 나름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물론 언어의 질서와 실제 세계의 질서가 불일치하는 부분이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한 건 어찌됐든 제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그 대상을 언어로 포착할 경우 그것은 내가 파악하는 세계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다른 말로,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또 현재 나에게 어느 정도의 위협이 되는지를 매우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이 제멋대로 크기를 부풀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상징계의 또 다른 이점은 흐름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흐른다. 은유와 환유의 기법이 무한정 적용되며 흐른다. 이 흐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멈추면 의미가 고착화된다. 사람이 좀 음침해지고, 우두커니 빠져든다. 카레르의 소설 "콧수염"에서와 비슷한 편집증적 집착이 발생한다. 사실 내가 예전에 변증법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변증법이 움직임에 대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멈춘 지점이 어디든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로 흘러갈 수 있는 절차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흐르기 위한 강력한 도구를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 암튼 그건 다른 이야기다.


그렇다면 상징계의 문제는 무엇인가? 언어가 타자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온통 타인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죽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들 노먼 베이츠의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유명한 예시라고들 한다. 나는 이걸 체험적으로 많이 느꼈다. 예를 들면 나는 나 자신을 "인용기계"라고 자조할 만큼, 모든 생각을 남의 표현을 빌려서 하는 버릇(?)이 있다. 가령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표현들, 아니면 할리우드 영화의 자잘자잘한 대사들이 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한 상황이 오면 나는 그 문구들을 사용해서 생각을 한다. 마치 내가 원래의 발화자였던 것 마냥 그 문장들을 발음하고 나면 "나는 생각했다" 라는 기분이 남는다. 하지만 모조리 착각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일 때도 많아서, 문장이 떠오르는 것이 먼저고, 그 문장을 억지로라도 지금 상황에 적용해보는 것이 다음인 경우도 많다. 사랑 고백, 임종 직전의 대사, 내적 독백, 희화화하기 등등의 수많은 상황에서 내가 과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대사 말고 순수한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후기 라캉이 천착하는 것은 이러한 "나만의 순수한 목소리"가 오직 공백의 형태로 발음된다는 가정이다. 그건 내 안의 언어의 흐름이 끊어지거나 버벅대는 지점이며, 타자가 실패하는 지점이며, 정신병원을 찾게 만드는 증상이 발현하는 지점이다. 질서 잡히지 않은 (아니, 그 정의상 질서가 잡혀서는 안 되는) 실재계가 상징계를 교란하는 사건이다. 짧게 표현하면 간극이다. 재밌는 논리적 사실은 이런 간극이 자아에겐 매우 우발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상징계는 모든 것을 필연적인 질서로 파악하고 있고, 따라서 그 질서 밖에서 넘어오는 것은 언제나 우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캉의 말에 따르면 후기 프로이트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실수는 이런 간극을 메우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벌어진 간극의 종류를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그 분류를 토대로 간극을 성급히 메워버리는 시술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간극은 언제나 계속해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상징계가 억압하는 실재계는 결단코 사라지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벌려 놓는 간극의 순간에 충실하여 벌어지는 진리-절차가 바로 라캉이 생각하는 주체의 정의다. 알랭 바디우는 그냥 라캉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즉 라캉의 세미나 11은) 이 실재계라는 것을 한참을 파고든다. 환상, 반복, 꿈, 대상 a, 응시, 뭐시기, 저시기, 거시기, 오줌 똥. 현란한 개념 놀이에 한참을 놀아나고 나니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내가 원한 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는데. 그리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주체-되기의 기술을 익히고 싶은 것이었는데. 고통-해방과 주체-되기의 연결은 얼마 전에 영화 디태치먼트를 다시 한 번 보면서 짓게 되었다. 거기에 스쳐지나가는 대사가 있는데 "이 고통의 바다에서 해방되는 것 (...) to be somebody..." 뭐 이런 느낌의 대사다. 나는 저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를 매우 무겁게 마음에 품고 "누군가"가 되면, 즉 주체가 되면 고통으로 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계시의 증거로 삼았다.


아무튼 그래서 이 책의 0장을 다시 읽어봤다. 라캉이 세미나 11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작성한 후기에 대해 해설한 0장에서 이 모든 개념놀이의 핵심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 나와 있었다. 핵심은 내가 예전에 민음사의 "양방향" 이라는 시집의 평론에서 발견한 한 구절로 대체할 수 있을 듯하다. "언어의 형식에 대한 고안을 통한 삶의 형식에 대한 고안". 결국 주체-되기란 나만의 문법을 고안하는 일이다. Like literally. 남이 말하는 건 막을 수 없다. People will talk. 중요한 건 남이 말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이 나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간극, 그 간극에서 솟아나오는 증상을 포착하여, 증상을 봉합하고 덮는 것이 아니라 지젝의 말대로 "당신의 증상을 즐기면서", 또 그 증상이 요구하는 진리-절차를 나만의 언어를 계속해서 생산하는 형태로 수행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주의자가 갑자기 등장해서 사적-언어가 의미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 것 같아서 흠칫했다). 그러니까 결국 제일 좋은 건 글쓰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시 쓰기일텐데 시를 쓸 때는 문법과 관념을 모두 내 맘대로 조작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후기 라캉의 정신분석은 "시적 실천" 이라고 책에 쓰여 있다). 하지만 나는 시를 쓸 줄을 모른다. "시클"같은 책을 주문해서 시쓰기를 허겁지겁 배워볼 수는 있겠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그냥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마치 토사물을 뱉어내듯이 잡스러운 글줄기를 뽑아내는 것이다. 여하튼 (아무리 잡스러울지라도) 글을 써야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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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정치학 - 세미나 11 강해
백상현 지음 / 에디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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