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 사회적 몸과 예배의 작동 방식 문화적 예전 시리즈 2
제임스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IVP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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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신학서적중고장터의 독서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립니다.

 

James K. A. Smith, Imagining the Kingdom, 박세혁 역,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서울: IVP, 2018)

_김동현

 

 

1. 지금의 기독교 교육은 구경꾼만을 양산할 뿐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니?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신학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익숙한 이들로서는 굉장히 낯선 말일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위기를 느낀다는 이일수록, 성경 공부와 신학 교육, 토론으로도 부족한 시간에 그따위 한가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냐며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듯, 기독교 교육계는 복잡한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굉장히 진지하고도 학문적인 주제로 인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기독교 교육계의 운전대를 돌려버린다. 그의 문제제기는 이렇다. 예배와 기독교 교육은 신자를 행동하는 이들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식과 개인적인 체험에 치중하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 교육은 구경꾼만을 양산할 뿐이다. 더구나 우리가 고도로 발전되고 명확한 세계관을 갖고 있더라도 그런 관점과 놀라울 정도로 모순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40) 행동은 지성에 앞선 다른 것이 이끌어내기 때문에, 지성으로만 강력하게 훈련시켜서는 세상 안에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사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내건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대안이 되는가? 저자가 말하는 상상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을지 머릿속으로 공상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무의식과 성향에 하나님 나라가 그려져 마치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한 단어가 하나님 나라의 토착민이다. ‘하나님 나라의 토착민은 마치 한 나라의 국민의 행동에 그 나라의 문화가 배어있듯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처럼 살아간다. “관련된 규칙에 관해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토착민으로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168)에 자연스럽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예전(禮典)’으로 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메를로퐁티와 부르디외의 사상, 그리고 인지과학, 신경과학 등을 활용해 행동을 이끌어내는 요소들, 특히 의 중요성을 증명하고, 여기서 사용된 개념을 통해 예전으로 교육되는 원리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그 증명을 세부적으로 살피기보다, 논지를 간략히 짚으며 어떻게 기독교 교육에 적용되는지 이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이론이 한국 교회에 적용이 가능할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2. 하나님 나라를 상상한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 우리의 습관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생각 때문에 행동할까? 만약 그렇다면 많이 공부하고 고민할수록 행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생각에 앞서는 무언가가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이끌어낸다고 주장한다. 바로 지각이다.

 

이러한 주지주의적 이론에서, 나는 상황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하고, 내 책임과 여러 가능한 결과를 따져 본 다음, 그러한 심사숙고의 결과인 행동을 하겠다고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이런 설명으로 보면 행동은 의도적·정신적·합리적 과정의 결론이다. 문제는, 우리의 행동과 행위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지주의적 행동 이론의 근본적 문제는, ‘보기평가하기를 두 개의 분리된 과정이라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 ‘적용될 수 있는 관련된 도덕적원리를 숙고한 다음, 선택하여 그 결과로 행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사실 지각과 평가는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나는 어떤 장면을 받아들이자마자 그것에 관해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에 근거해 그 장면을 판단한다. 지각 자체가 이미 평가로서, 나로 하여금 나의 성품과 열정의 지향의 형성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굵게 표시된 부분은 편집자 주)(76-77)

 

요약하면, 숙고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우리의 성향을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에 앞서는 무언가인 지각무의식적이며, 상황을 바라보며 느끼는 개인의 정서를 통해 빚어져 지향성을 갖는다.


저자는 여기에 메를로퐁티가 이해하는 을 가져온다. 지각은 체현되었다는 점에서 몸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지각의 지향성을 통해 세상을 헤쳐 나가며 행동한다. 그리고 이 행동은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되며 자연스러운 습관이 된다. “근본적으로 지향을 제공하는, 일종의 습관화된 지식 혹은 노하우”(94), 세상에 다가가는 이러한 일차적인 접근 방식이 프락토그노시아. 우리는 저마다의 프락토그노시아로 세상을 이해한다. 저자가 말하는 상상력은 이 프락토그노시아를 가로지른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한다는 것은 첫째, 프락토그노시아처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 우리의 몸에 습관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게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를 위해 무의식정서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습관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은 공부가 아닌 재습관화, ‘감정은 메시지가 아닌 이야기로 말이다. 그렇게 그의 프락토그노시아를 확장 또는 교정한다. 저자는 교리 교육이 아닌 예전으로 재습관화와 이야기에의 참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예배와 성례, 영성훈련 등을 통해 기독교적 이야기에 빠져 들어 우리의 지각이 성화되고, 성경의 가치관을 담은 행동이 우리의 습관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에 소개된 것처럼 온 세상 모든 영역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도로 표현함으로써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무대의 등장인물이 되어 이야기 안에 빠져든다. 이러한 기도를 반복하는 동안,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 신자는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 구원의 사역을 지향한다.

 

 

3. 하나님 나라를 상상한다는 것은 둘째, ‘하나님 나라의 토착민이 되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구성해가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행동은 생각에 앞서 지각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지향성, 상상력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몸을 가르치는가? 우리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부르디외의 사상을 가져온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지향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지향성, 습관, 정서는 구조(체계)’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사용하는 개념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따라서 그는 아비투스를 영속적이며 치환할 수 있는 성향의 체계, 그리고 구조화하는 구조로서 기능하는 성향을 갖게 하는, 즉 목적에 대한 의식적 지향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용의 명시적 숙달을 전제하지 않은 채 그 산물에 객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실천과 재현을 생성하고 체계화하는 원리로서 기능하는 성향을 갖게 하는 구조화된 구조로 설명한다.”(150)

 

아비투스는 요약하면, “내 안에 새겨진 공동체적·집단적 성향”(150)이다. 먼저, 내 성향은 공동체, 제도, 집단 속에서 구조화된다.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성향, 지향성(이하 아비투스’)이 내 안에 흡수되는 정도까지만 편안함을 느끼고, “아비투스를 습득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151) 쉽게 말해 내가 성경의 가치관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내게 기독교적 아비투스가 심어져 기독교적으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비투스는 지식이 아닌 행동으로만 알 수 있는 실천 감각이다). 만약 기독교적 행동이 늘 불편하기만 하다면 교회 공동체에 머무르기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아비투스는 치환할 수 있는 성향의 체계이며 구조화하는 구조. 공동체는 체현된 전통을 전수해 특정 대상의 아비투스를 바꾸고(치환할 수 있는 성향의 체계), 공동체의 아비투스가 새겨졌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아비투스를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구조화하는 구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향을 받는 데에만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세상을 구성해 간다. 수용한 아비투스로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내 안에 세상을 구축해감과 동시에, 이 아비투스를 전수함으로써 또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채우는 것이다. 마치 한 나라의 국민에게 그 나라의 문화가 젖어들 듯이, 또 그 나라는 그 국민과 그 문화가 채우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를 상상한다는 것은 둘째, ‘하나님 나라의 토착민이 되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구성해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아비투스를 습득함으로써 그 나라의 행동에 자연스러워진다. 거듭 표현하는 것처럼 마치 국민의 내면에 그 나라의 문화가 젖어있듯 그렇게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토착민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토착민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아비투스를 심는다. 그렇게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아비투스, 토착민으로 채운다. 하나님 나라로 구성해가는 것이다.

 

 

4. 하나님 나라를 상상한다는 것 : 예전을 통해 지각을 성화시켜라

 

결국 저자는 어떤 기독교 교육을 대안으로 내놓을까.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행동하는 이들 - 개혁과 갱신의 이루는 사람들 -을 보내는 데 전념하는 모든 선교적 형성적 기독교 기관은 우리의 아비투스를 재형성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268)

 

지각의 성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행동하도록 부르심 받은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체적 태도(프락토그노시아)이기 때문이다.”(268)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적 상상력이다. 상황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 경험을 구성하는 신체적 배경에 의해 빚어지기 때문에, 기독교적 행동을 위해서는 육화된 의미라는 신체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지각의 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요컨대, 우리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행위자가 되어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욕망을 체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상상력이 하나님에 의해 징집되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상상력이 모든 피조물을 회복시키고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에 사로잡혀야 - 그 이야기 안에 갇혀야 - 한다. 우리가 설득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감동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코스트코에서 웬델 베리의 책을 읽게 될 것이다. 설득은 되었지만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269)

 

그러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3:17) - 즉 바르게 질서 잡힌 방식으로 - 문화적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습관과 욕망을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욕망과 일치시키기 위해 규칙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중심을 향해 우리를 다시 방향 짓는 실천과 훈련의 레퍼토리에 규칙적으로 몰입해야 한다.”(267쪽)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적 지성을 훈련시키느라 쉴 새 없이 달리는 교회와 기독교 대학의 핸들을 돌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예전과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이렇게 잔소리하리라. “책 많이 읽고 교리나 달달 외운다고 예수 닮는 거 아니야! 네 삶이 기독교적 이야기에 젖어들어야 돼. 매일 같이 예배하고 영성을 훈련하면서 네 몸이 예수를 기억한다고. 구경꾼이 되지 말고 토착민이 되란 말이야!”

 

 

5. 나가며 : 제임스 스미스의 조언이 한국 교회에도 유효할까.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 그치는 기독교 교육의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생각해보면 초기 기독교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지식을 가졌지만 지금의 교회가 그들보다 예수를 닮았노라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고, 어지간한 전문가 못지않은 학력을 가져야만 목회자가 될 수 있지만 부끄럽지 않은 윤리의식을 가졌노라고 자랑하기 어렵지 않은가. 세련된 비판은 넘쳐나지만 진실한 행동은 부족하다. 저자의 지적처럼 안타깝게도 신앙은 지식의 총량에 항상 비례하지 않고 있다. 분명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저자의 외침이 지식에 치우친 기독교 교육의 한계에 경종을 울리고 통찰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 곧바로 대입할 수 있을까. 아니, 유효할까. 글쎄, 너무나도 빠르게 주지주의식 기독교 교육의 한계를 겪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긴 하지만 조금은 이른 것 같다. 아직까지는 충고 정도로 듣고, 진행하고 있는 기독교 교육의 단점을 보완해가는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저자는 지성적 기독교가 답은 해줄지언정 체감하지는 못하게 한다고 불평한다. 맞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답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제야 조금씩 답을 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적 아비투스가 아닌 교계 지도자들의 무지에서 비롯한 억지가 지배담론이었음을 인식하고 비판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이 이론이 당장 도입된다면 다시금 신학을 경시하게 될 것이고 다시 억지가 지배담론이 되는 과거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에겐 미안하지만 아직 한국 교회에겐 예배와 예전의 방향을 잡아줄 신학 교육이 절실하다.


   이 책을 덮고 독자들은 이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 내가 처해 있는 기독교 교육의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지식만 좇지 말라. 저자의 지적처럼 구경꾼만을 양산해낼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만 좇지도 말라. 우린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교회사가 증명하듯, 예전이 풍성할 때 분명 영성도 함께 풍성하긴 했지만 예전풍성했을 때 교회 안에는 미신과 우상이 가득했다. 지금으로선 예전풍성해질지도 모른다. 기독교 교육의 현장에 있는 당신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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