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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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개운한 아침. 그리고 꿈틀꿈틀 샘솟는 글쓰기 욕구. 집 근처에 한적하고 근사한 커피 바에 갔다.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들어가기도 전에 작은 창으로 여성(으로 패싱되는) 직원 두 분이 밝게 인사하며 맞이해주셨다. 따뜻한 라떼를 시키고 직원들이 커피를 내리는 곳 바로 앞 바에 앉았다. 모자를 쓰고 긴 머리에 하얀색 반팔티를 입으신 직원분께서 웰컴티로 소주잔 크기의 차가운 레몬쑥차를 주셨다. 커피를 마시기 전에 마시면 커피 향을 더 선명하게 감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며. 이 대사를 이 공간에 오는 모든 손님에게 말했다. 매일 반복해서 말하는 멘트일텐데, 그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는 느낌보다는 진짜 상대방에게 말을 걸고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느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이컨택을 하고 그 멘트를 처음듣는 상대의 귀와 뇌에 잘 전달되는 속도로 말했기에.

머무는 동안 마음이 편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정보는 입력하고 어렴풋이 알고있었지만 말로 정리하지 못했던 문장들에 밑줄 긋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하며 책을 읽었다. 머릿 속 떠돌며 헤엄치는 생각들을 붙잡아 타이핑하여 텍스트로 실체화시켰다. 순조롭고 매끄럽게 작업에 집중했다. 이 모든 것이 내 컨디션 하나로 진행될 순 없었을거다. 집을 나서서 이 공간에 들어오고 여기서 마주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환대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났기에 가능했다. 한 타인의 친절함이 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냥 흘러갈 수 있는 순간에 어떤 형태와 질감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도 현재 하는 생계로서의 일에서 손님응대 순간이 있다. 친절할 때도 있지만 대게는 사무적으로 멘트를 반복하고 해야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한다. 체력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양한 일터를 통과해오며 굳어진 생각으로 인해서가 크다. 언젠가부터 서비스직에서 친절함을 떠올리면 감정노동이 이어서 떠올랐다. 하여 굳이 친절해야할 필요없다는 마음으로 일해왔다. 이는 자본주의와 물가인상률에 따라 비례하지 않는 최저급여 인상률이라는 시스템적 문제가 우선하고, 내가 받는 임금에 감정노동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있는지 계산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연루되어있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됐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타인이지만,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고, 많은 대화가 오고가진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교류를 주고 받았다는 점에서 이어져있었고, 이 찰나의 경험을 통해서도 삶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구나. 한 명의 타인과 이어져있었지만, 내가 발 붙이고 있는 이 동네와 이 지역구와 더 나아가 세상과의 연결됨을 확장되어 느꼈다.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연극을 한다> 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의 문체는 자신과 타인 사이에 오가는 드라마틱한 눈빛과 표정, 숨 막히는 찰나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포착하는데, 단순 설명을 넘어 각 인물의 목소리와 억양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화체를 주로 사용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고닉이 체현하는 그 숨막히는 거리감에서 ‘나와 타인’이 비로소 ‘우리’로서 기능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고닉이 거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곳에서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거리는 무대이고, 거리를 지나는 모든 사람은 고닉을 포함하여 주인공이 된다. 고닉은 마주친 수많은 사람을 관찰하고, 귀를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마주친 낯선 이에게서 유명인이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 추억하고, 시끄러운 소란과 고성이 오가는 곳에 멈춰서서는 그의 외침을 자신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거리에는 우연이 아닌 보이지 않는 관계가 얽히고설켜 하나의 서사로 연결된다.*

책에서 오늘의 상황과 어울리는 문장을 소개한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이 도시 그 자체처럼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하나로 어우러져 있지는 않다. 내 친구인 사람들이 서로 친구는 아니다. 가끔씩 내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이 들고 뉴욕 사람들이 모두 동류로 느껴질 때면, 이런 우정들은 느슨하게 연결된 목걸이의 구슬처럼 느껴진다. 각각이 서로 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두 내 목 아래쪽에 가볍지만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게 마법 같은 따스한 연결감을 불어넣어주는 구슬." 15p

"그들이 했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리고, 그 얼굴과 몸짓이 눈앞에 떠올라 나는 혼자 웃는다. 나는 여기에 대화를, 저기에 해석을, 또 그다음 어딘가에는 논평을 덧붙이며 그 장면들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나는 내가 시간을 뒤로 돌리며 나와 마주치기 전의 그들을 상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나는 흠칫 놀라, 내가 하루의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막 나를 지나간 시간에 형태와 질감을 부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 나를 스쳐 간 사람들이 이제 나와 함께 방 안에 있다. 그들은 친구가, 거대한 친구들의 집단이 되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 그들은 내게 서사적인 충동을 되돌려준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내 삶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도록 나를 일깨워준다."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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