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여정
박대영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1. 묵상의 여정-저자 박대영목사

 

묵상의 여정을 만나며, 참으로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간 사역에 몰두하다보니 가슴은 하염없이 매마르기만 하고 영적으로 고갈되어가기만 했다. 모두들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 초여름에 만나 책 읽기를 약속한 사실을 기억하고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무슨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던 중 정말 좋은 책을 발견해서, 함께 읽게 되어 다행이며 기쁨이다.

 

책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프롤로그가 보인다. 책 전체의 흐름과 내용을 먼저 소개하는 첫 부분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묵상은 현재 진형형인 여정이다. 그래서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며, 관계의 여정이기에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라 함께 가는 여정이다.” 라고 묵상의 본질과 목적을 소개하고 있다.

멋진 말이다. 그리고 제대로 묵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말이다.

 

이렇듯 저자 박대영목사는 일상적인 언어를 글 속에서 아주 적절하게 그리고 빛이 나게 사용하고 있다.

 

계속 살펴보면,

1. 묵상은 소통이다. 나를 이 여정에 부르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의 소통이다.

2. 삶의 여정은 묵상의 여정이다. 자신이 무엇을 절대 가치로 삼고 절대 기준으로 삼으며 절대 목표로 삼는지를 누구든지 묵상하여 결정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묵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묵상하고 무엇을 묵상하고 무엇을 위해서 묵상하느냐다.

여기서 저자는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묵상을 삶의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종교행위로 이해할 때 묵상의 인격성과 관계성은 사라지고 묵상의 방법과 관습만 남게 된다.” 어쩌면 지금껏 우리가 해온 묵상이 바로 이러한 묵상이 아니었나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보나벤투라의 말처럼 묵상은 하나님을 맛봄이고 하나님 나라를 누림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성령께서 관여하지 않으시면 이루어질 수 없는 대화다.” 라고 말한다.

 

3.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묵상은 필연적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다툼을 일으키고, 가치관과 가치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한다.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통해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를 망각하고 그에 무관심할 것인가 사이의 대립이묵상하는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저자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대로 묵상하는 자에게는 이러한 싸움과 부딪힘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여정속에서 분명코 희열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묵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를 지나면서, 1부와 2부를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 해본다.

 

1부 묵상 여정으로의 초대

저자는 먼저 친구의 회심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끝부분이 재미있다.

나 하나 교회 박차고 나가 봤자 하나님이 눈 하나 깜짝 안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 내 맘만큼 독하지 못하시더라. 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 모질었어. 그분 뒤통수에 대고 할 말 못할 말 다 했는데. 참 속도 좋으시지. 어디가 예쁘다고 이렇게 맘을 고쳐먹게 해주시는지.”

 

그런데 그분, 내 맘만큼 독하지 못하시더라.” 그렇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에 아버지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계시는 것이다.

 

1.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에서 저자는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단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가 거절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결정이었으며,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자기 포기의 결정이었다.”

이런 생각을 이런 깊음의 말을 할 수 있었던 저자가 부럽기까지 할 정도로 정말 깨달음을 주는 말이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버림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역사의 매 순간 먼저 손 내밀고 불러 주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눈먼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희망이란 없었을 것이다. 눈먼 사랑의 하나님!

 

2. 묵상은 하나님과 추는 춤판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리듬과 박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묵상의 단어를 거부하고 더 구체적이며 더 친밀하며 더 인간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하다. 늘 거룩한(?)언어에 붙잡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교리적인 언어 속에 갇혀 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저자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2장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묵상의 시작은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란? 하나님의 자기 부인, 자기 비하, 자기를 내어줌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의 근거요 이유이자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수용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바로 묵상이다. 따라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한다는 것,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또 하나 저자의 수사적 표현이 돋보이는 문장이 있다.

묵상은 하나님을 읽는 일이기 전에 나를 읽는 일이며, 하나님께 내가 읽히는 일이다.”

정말 근사한 말이다. 하나님께 내가 읽히는 일이 바로 묵상이다.

그렇다. 결국 하나님께 읽혀야만 하나님께 온전히 속해야만 묵상이 가능하리라 본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아브라함 헤셸의 이야기를 전한다. p48 찾아볼 것

 

2장 마지막으로 저자는 다윗을 주목한다. 법궤가 들어올 때 벌거벗고 춤추는 왕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행위다. 그래서 벌거벗고 춤추는 왕 이라는 모순적인 정체를 수용했다. 모순적인 정체

 

이 모순적인 정체를 수용한 반면 사울왕의 딸 미갈은 도리어 자신을 지키느라고,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을 계산하느라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발돋움할 수 있는 도약대를 경멸한 것이라 말한다. 이 미갈의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보다 인간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들, 적절한 품위를 지켜야만 하는 가식적인 태도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묵상을 방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면한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춤판에 참여하라 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나?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인간 아닌 모습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통제하고 조종하고 조작할 수 없는 타자 즉 하나님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오늘도 인정하고 매 순간 마다 인정하는 것 이것이 묵상임을 1장과 2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앞으로 3장 그리고 4장 계속 이어서 어떠한 그림으로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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