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볼링 - 볼링 얼론: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승현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적 자본

 서론에서 퍼트넘은 개인적 이익=공적인 이익 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로부터 생긴 이익은 투자자의 직접 이익 말고도 구경꾼에게도 사교와 사업상의 접촉 등 개인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에서는 사회적 자본이 20세기의 마지막 3분의 1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왜 계속 줄어드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원인의 가장 큰 부분은 신뢰의 감소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어 어떠한 클럽에서 처음 또는 몇 번 마주친 사람들이 접촉을 할 때 신뢰가 없다면 구경꾼들의 개인적 이익이 창출 될 수 있을까?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 간의 사업상의 접촉은 비효율적이며 이루어질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개인적 이익이 감소하면서 개인들의 사회적 자본에 대한 참여가 줄어들 것이고 공적인 이익을 추구하던 단체는 점점 쇠퇴하게 된다. 신뢰와 사회적 자본의 흥망성쇠는 정확히 비례관계라고 생각한다.


-종교와 시민참여

 퍼트넘은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적극적인 사회적 자본가라고 했다. 사실상 종교가 올바른 시민참여를 낳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종교의 취지는 대체로 이타성이 강하며 도덕적이다. 그러한 종교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사회적인 활동은 도덕적이며 이타적이고 그 속에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해 나간다. 종교는 시민들에게 올바른 시민참여를 이끌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의 흥망성쇠의 수치는 종교의 증감수치와 거의 비례하는데 그 정도로 종교와 사회적 자본의 연관성은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또 미국에서 시민들의 사회, 정치적 운동에서 교회는 제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적 자본과 시민참여에 대한 종교의 역할은 무궁무진 했다. 그러나 이제 종교의 참여도가 줄고 있다. 또 만약 종교에 참여한다 해도 이전처럼 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줄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늘고 있다. 종교의 하락세로 인한 미국의 시민참여의 하락을 미국은 어떤 것으로 메꿀 수 있을 것인가? 계속 글을 쓰며 생각해보자.


-직장과 사회적 자본

 직장에서의 경쟁구조가 생기기전의 직장에서는 근로자는 개인적 유대관계를 최소한 하나 정도는 맺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근로자들은 그곳에서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느꼈으며 직장 내에서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경쟁구조와 대규모구조조정을 통해 사회는 근로자들에게 경쟁을 부추겼고 결과적으로 기업에서의 사회적 자본은 쇠퇴했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로날드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등장했고 그러한 새로운 체제가 미국 기업의 사회적 자본을 쇠퇴 시킨 것이다. 경쟁 구도 속 동료마저도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신뢰가 형성 되고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경쟁을 추구했을 때 사회적 자본의 감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주의를 강화시키며 개인들 간의 경쟁을 부추겼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자본을 감소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직장이 자원봉사자를 충원하는 중요한 토대로 남은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 그 또한 경쟁의 일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참여자에서 구경꾼으로

 책 제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나 홀로 볼링' 즉 사람들은 이제 리그 없이 볼링장에서 즉석으로 만난 사람과 편을 짜서 볼링을 치거나 한다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모이는 볼링 리그에 비하면 그러한 즉흥적인 볼링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모인다는 것은 모이는 사람들에게 있어 소속감을 준다.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서울지역 정치학 연합학회만 봐도 그렇다. 격주로 모여 규칙적으로 세미나를 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에 내가 이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만약 내일 어떤 유명인사의 강연회가 있어서 즉흥적으로 그 강연회를 참여했다면 내가 그 강연회에 가서 소속감을 느낄 것인가? 전혀 아니다. 나는 그저 구경꾼으로서 강연회를 가끔 있는 이벤트처럼 생각하며 참여했을 것이다. 확실히 두 경우를 봤을 때 서정련처럼 주기적으로 계획이 잡히고 소속감을 가지며 하는 활동은 재참여를 하며 소속된 사람들끼리 유대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러한 강연회는 다른 유명인사의 강연회로 다시 열린다 해도 재참여의 확률이 전자의 것보다는 현저히 낮을 것이며 만약 재참여를 한다 해도 소속감 때문이 아닌 그저 유명인사의 강연이 목적일 뿐이다. 그렇다 이 예시를 봤을 때 사람들이 참여자에서 구경꾼으로 변질 되는 것은 사회적 자본에 큰 타격을 미칠 수 있다. 수많은 구경꾼들을 우리는 다시 참여자들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타심, 자원봉사, 자선심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토크빌이 지적한 '마음의 습관'이 미국인들에게는 꽤 다수에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의 습관이 사회적 자본의 증가를 가져오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시민적 참여의 전국적 하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선행은 계속하여 상승하거나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베이비붐 세대에게선 그러한 마음의 습관이 없거나 미미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국 전체적으로는 이타심, 자원봉사, 자선심이 풍부하다는 것은 자원봉사가 감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보여준다. 그런데 퍼트넘은 밀레니엄 세대는 앞 세대들보다 자원봉사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고 하며 밀레니엄 세대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시민적 참여의 전국적 하락이 있었음에도 자원봉사는 증가한 점을 보면 자원봉사에 대한 책임감이 시민적 참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란 기대를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개인적인 자원봉사를 할지 아니면 공동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타심, 자원봉사, 자선심은 사회적 자본이 잘 형성 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자본을 유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 같다.


-호혜성, 정직, 신뢰

 일단 기본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호혜성은 포괄적 호혜성, 즉 지금 내가 남에게 베푸는 선행을 구체적인 보상을 원하지 않으며 내가 선행을 베푼 대상 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보답을 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호혜성은 서로간의 또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호혜성이나 정직이나 이 두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뢰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 미국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호간의 신뢰는 현저히 줄었다. 결론적으로 더 이상의 포괄적 호혜성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호혜성과 정직, 신뢰의 감소는 미국에서 변호사의 증가를 불러왔다. 변호사는 그 세 가지의 대체제인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각박하게 만든 것인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경쟁이 그들을 그렇게 각박하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신뢰와 호혜성의 감소가 신자유주의의 폐해 때문이라는 견해가 완전히 틀리진 않지만 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떠넘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원인에 대해서는 어떤 정확한 답을 찾기가 힘든 것 같다.


-매스미디어의 확대와 시민적 참여

 인터넷을 통한 시민적 참여나 공동체의 형성은 확실히  양적인 측면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를 증가시킬 수 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로 인해 모인 시민들은 의무감, 신뢰성, 호혜성이 없으며 와해되기도 쉽다. 일시적인 증가나 단순한 소통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모여 얼굴을 맞대고 형성된 공동체보다 오래 지속 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는 종교의 하락세와 구경꾼으로 변모하는 시민 참여의 공백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첨단 네트워크는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항상 대중매체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나의 대답은 한결 같다. 결국 사용자의 재량에 따라 이득이 될지 해가 될지 결정 된다는 것이다.  매스 미디어 또는 온라인 커뮤니티는 시민적 참여가 간단한 만큼 그만 두기도 쉽고 우리가 접근하기 쉬운 만큼 그것을 악용하려는 자도 접근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러한 매체들이 사회문제에 관해 결속력 있는 시민들을 모으기에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신문과 시민참여(서정련 토의)

 인쇄물로 꾸준히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이 다른 매체로 뉴스를 확인하는 것에 더욱 적극적이며 나아가 시민참여에도 적극적이다. 라는 퍼트넘의 주장이 있다. 물론 다른 매체로 뉴스를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인쇄물 까지 보는 사람은 그만큼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사람의 시민참여가 저조하다고는 할 수 없다. 첨단 전자기기가 발달 된 현시점에서 오히려 신문 구독이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이제 인터넷 신문이 시민참여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를 생각해보자. 일단 인터넷 신문은 정보탐색이 용이하며 습득하기가 쉽다. 바로 이점은 장점이며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신문은 아무래도 인쇄 출판하는 신문보다는 검열이나 객관적 정보 전달 같은 부분에서는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빠른 정보 전달로 시민들이 어떠한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하며 시민들이 결집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들이 본 것이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항상 인터넷이나 대중매체에 관해 글을 쓸 때 드는 예로 2008 광우병 사태이다. 온라인 네트워크가 시민들을 징집시킬 수 있으며 시민참여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동시에 잘못된 사실로 시민들을 선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미디어는 양날의 검이다. 시민참여는 증가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선동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 세대와 시민의 정치참여

 실제로 과거 모든 시민들이 공감할 만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세대의 결속력은 현재보다 강하며 이는 시민참여로 나타났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존재할 때 결속력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공황을 겪은 세대의 결속력은 매우 강했으며 그러한 경험은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의 급격한 증가로 전후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러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겪지 못한 세대한테서 사회적 자본, 시민 공동체는 계속하여 하락하였다. 근데 이러한 현상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본다.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먼저 우리는 고등학교 A 전체를 한 세대 및 국가로 전제하며 각 반을 개인으로 전제하자 그리고 고등학교 B는 외부적으로 전제하자  고등학교 A에서 반별로 체육대회를 할 때 각 반은 다른 반을 경쟁상대로 인식하며 각 반별마다 결속력이 강할 뿐이고 학교 전체적으로는 결속력이 강한 몇 개의 집단들이 경쟁을 하며 분열된 상태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외부의 다른 적 고등학교 B와의 경기가 있다. 그랬을 경우 고등학교 A는 하나가 되며 전체적으로 결속력이 강화된다. 바로 이런 것이다. 국가에 위기가 닥쳐서 모두가 위험에 처한다면 모두들 함께 도와서 역경을 헤쳐 나가려 하지만 그렇지 않고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들은 결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시민 공동체는 힘을 잃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있을 미래에 국가 전반적인 위기가 미국뿐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 다가온다면 그 때 그 위기가 다가온 국가의 사회적 자본은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거나 국민 모두가 체감하지 못할 약한 위기는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자본의 감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사회적 자본 감소라는 그 문제점만을 살펴봤을 때는 부정적이지만 말이다.


-경제와 사회적 자본의 상관관계

 경제의 상승이 사회적 자본의 증가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의 상승을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 홀로 볼링'에서 퍼트넘은 경제는 하락과 상승,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지만 사회적 자본은 계속 하락세를 걸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경제의 상승과 하락은 사회적 자본의 상승과 하락에 전혀 관계가 없으며 사회적 자본은 다른 이유로 인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 기반은 사회적 자본이 더 잘 이루어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상관관계가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회적 자본 감소의 원인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감소와 교육의 질

 사회적 자본의 감소는 학생과 부모가 클럽, 학급 활동, 운영 위원회, 교육정책 압력단체에 대한 참여도 감소시키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런 활동들도 시민 공동체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의 감소가 교육의 질을 떨어트리는 첫 번째 원인이다. 교육에 대한 시민 공동체의 감시나 피드백이 감소하면 그렇지 않았던 이전보다 교육의 질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두 번째로는 사회적 자본이 높은 주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들의 TV시청 시간이 적다는 것인데 TV시청은 사회적 자본의 감소를 가져오며 그렇다면 사회적 자본이 약소한 지역의 학생들의 성적은 사회적 자본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의 사회적 자본이 잘 이뤄지고 있는 곳에서는 어떠한 유형의 시민 공동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중에는 학생들 간의 스터디그룹이나 독서클럽 또한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봤을 때 사회적 자본의 감소는 청소년들의 교육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부모 세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싶다면 사회적 자본을 증가시켜야 한다. 대표적으로 자식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들이 학교에서 학부모위원회 등에 참여하는 것이 그 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학부모들의 수가 그 학교의 학생 수와 비교했을 때 매우 낮은 비율이라는 점이다.

 

-자유와 평등의 이율배반과 공동체

 자유와 평등은 서로 가치를 침해하지만 또 둘을 분리해놔서는 안 된다. 자유와 평등의 모습은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책임윤리와 신념윤리와 같아 보인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나의 자유가 지나치다면 사회에서 누군가는 내가 지나치게 자유로운 만큼 자유를 침해 받고 있다. 또 모두에게 지나친 평등을 요구한다면 누군가의 자유를 평등으로 침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둘에게는 중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에 알맞게 그리고 평등한 자유여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나오듯이 사회적 자본은 편협 적이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면서 관용은 증가했다. 여기서 사회적 자본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공동체의 목적이 어쩌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지역에 혐오시설을 막기 위해 모인 공동체 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용의 문제는 그 세대자체가 관용이 없었으며 물론 공동체가 편협성과 불평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를 포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퍼트넘의 통계자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에서 가장 관용적인 공동체는 시민 참여가 가장 활발한 곳과 일치한다고 했다. 우리는 공동체와 자유 그리고 평등을 모두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관용을 배우는 것이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롭고 평등하며 관용적인 시민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결속형 사회적 자본과 연계형 사회적 자본(서정련 토의)

 퍼트넘은 결속형 사회적 자본, 즉 단체 내에서의 사회적 자본은 오히려 외부에 대한 배타성을 키우기 때문에 연계형 사회적 자본처럼 사회 전체에 대한 신뢰를 증진시키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과연 연계형 사회적 자본이 신뢰를 쌓기에 좋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연계형은 네트워크가 기반이 되며 또 네트워크를 이룬 사람들 간의 결속이 약해 소속감 또한 약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신뢰를 효과적으로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결속형이 배타적 성격을 띠게 될 수는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연계형보다 신뢰를 쌓기에 좋으며 배타적 성격을 띠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정기적으로 모이며 그러한 모습을 봤을 때 나는 교회를 결속형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교회가 배타적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항상 배타적이기 보다는 이타적일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결속형 사회적 자본을 배타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결속형과 연계형에 대한 내 생각은 이 두 가지 중에서 뭐가 더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보다는 이 둘에 대한 내 생각을 써본 것이다.


-감상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퍼트넘의 'Making Democracy Work'를 읽었는데 두 책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사회적 자본이 우리 사회에 해가 되는 부분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사회적 자본의 증가는 교육의 질을 증가시켰으며 이타적인 사회를 만들었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 자본의 감소는 과연 불가항력일까?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 또 다시 시민들이 결속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우리는 이제 글 앞에서 말한 양날의 검인 매스 미디어를 이용해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며 시민참여를 이끌어 내야한다. 매스 미디어의 활용은 양날의 검인만큼 매스 미디어에 대한 시민들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감시가 필요하며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토크빌의 이 말이 떠올랐다. "그 자체를 사랑할 것,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의 독립성과 권리를 진정 존중할 것, 정부가 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과 일치하더라도 그 권력을 견제하고, 그 영향력을 제한하며, 점진적 합리적으로 행정 분권화를 실현해 나갈 것,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적대감, 뜨거운 사랑, 위대한 희망, 그리고 강력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그 아무것에도 강렬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 우리는 그 아무것에도 강렬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며 신뢰성은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강렬한 믿음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을 매스 미디어가 점점 대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어려운 책이었지만 서정련 세미나에서의 발제와 토론 덕에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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