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egetarian : A Novel (Paperback) - 『채식주의자』영문판
Han Kang / Granta Books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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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론 한순간에 변해버린다.

 

 

"그 가을 아침 영혜에게 줄 나물을 싸들고 자취방을 찾았을 때

그녀가 본 광경은 상식과 이해의 용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삶을 살아온 영혜는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의 영향으로 돌연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아니, 사실 영혜는 나무가 되어간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엔, 한번 변하면 걷잡을 수 없이 확 바뀌어 버린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영혜가 그렇다. 영혜는 갑자기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변해버린 영혜를 받아들이지 못할정도로 영혜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런 영혜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혜의 모습을 보고 문득 내 경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어느 때처럼 미술 학원을 가는 중이었던 나는 갑자기 '내가 누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내 손발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손발 뿐만 아니라 내 몸, 내 이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 심지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까지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을 처음 살아본 사람처럼, 오늘이 몇요일인지 모르겠어서 학원이 아닌 집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나중에서야 사춘기 때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런 생각과 느낌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됬지만, 간혹 또다시 그런 기이한 느낌에 휩싸일 때면 너무 무서운 기분이 들어 그저 눈을 꽉 감아버려 다시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채식주의자를 보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아마 꿈에서 깨어난 영혜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 이런 난해한 질문을 피하기만 하였지만, 영혜는 그 질문 끝에 자신은 나무라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앞서 말했듯,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지만 의식이란 놈은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궁극적인 고민을 끝낸 영혜를 바꾸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바뀌어버린 영혜는 가족도, 남편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개의치 않는다. 영혜는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이 디딘 바닥에 뿌리를 내려 푸르른 녹음이 될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라 그저 빛 입자가 물체에 반사된 것을 보는 것 뿐이라던데, 영혜는 우리와 다르게 무언가 궁극적인 것을 보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그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책에 나온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끈을 놓은 자와 놓치 못한자. 동생 영혜를 마지막까지 돌본 언니 인혜는 영혜를 보며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이었던 자신의 인생을 객관시 해본다. 자신만의 세계에 온전히 자유로운 영혜와 비교해 보았을 때, 자신의 인생은 너무나도 제약이 많고, 복잡하고, 피로하다. 하지만 영혜처럼 끈을 놓지 못한다. 그렇게 언니로써, 엄마로써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한다.
인혜가 영혜처럼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보통의 우리들처럼 인혜 역시도 번잡한 이 세계와 너무 많은 관계를 맺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제멋대로 하고 싶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러지 못한 까닭에 이제는 자신이 어떤 쾌락을 꿈꾸었는지도 가물가물하는 그런 상태. 커가면서 책임을 하나 둘씩 지게 된 어른은 이제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힘들고 고되면서도 나와 너무 엉켜버린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하나 둘씩 매다보니 어느새 자기 자신이 그 꼬인 선들로 인해 데롱데롱 매달려 버리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모습은 인혜 뿐만 아니라 과거의 영혜의 것이기도 하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두 가지 인간 유형을 잘 대조되어 보여준다. 책을 다 읽고 난 나는 가끔은 영혜처럼 끈을 놓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아마 그러면 영혜의 형부처럼 욕망을 추구하다 결국 욕망에 미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덧. 영어로 처음부터 읽기엔 조금 어렵다. 먼저 한국말로 읽고, 영어로 읽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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