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리카 종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 <비행공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대학에서 만난 첫 남편과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정신과의사이자 중국계 미국인 남편 아랑 종과 결혼한 후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생활, 무역상 아버지와 화가 집안의 어머니, 레바논 남자와 결혼한 언니, 남편과 함께 참석한 학회, 네 번의 결혼과 거침없는 성적 상상 등 그녀의 자전적 요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1973년 발간된 이 책은 신페미니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큰 '문제작'이라고 불린 장편소설이다. 1970년대 TOP 10도서에 선정되고, 75년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학상, 도빌문학상 등을 받았다고 한다.

진실을 말하는 건 위험하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게 <비행공포>가 그랬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는 무척 두려웠고, 책이 출판된 직후에는 열렬한 찬사와 날선 비난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솔직함이 인정받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로 인해 감옥에 갈 수도 있기에. 그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작가는 오래갈 수 없다.

전통적인 여성상,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나 체면 따위를 버리고 자신의 내재된 욕망과 마주한다1973년 발표된 이 작품은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상당히 솔직하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이 작품이 그 시대에 나왔다는 게 놀랍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거침없이 성에 대한 표현이 많다. 그 시절에 문제작이라고 불렸을만 하다.

내 환상의 인질. 내 두려움의 인질. 나 자신이 내린 잘못된 정의의 인질. 여자로 산다는 건 도대체 무얼까? 만약 그게 랜디처럼, 나의 엄마처럼 사는 거라면 나는 여자로 살고 싶지 않다. 그것이 분노를 뿜어대고 아기를 낳는 기쁨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거라면 나는 원치 않는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지적인 수녀가 되리라.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자아를 찾기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여성 '이사도라'의 이야기이다. 화가를 꿈꿨으나 외할아버지에 의해 꿈이 좌절된 어머니와 무역상 아버지, 결혼하고 아기를 기르는 것을 극도로 찬양하는 듯한 다산의 여왕인 그녀의 언니, 언니와 비슷하게 사는 동생들 사이에서 이사도라는 독특한 존재로 취급받으면서도 동시에 집안의 걱정거리이다. 과거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랬던 것 처럼,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와 책임에 순종적인 반면에 주인공은 부여된 것들과 맞서며 사회적 굴레와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뻐걱대기 시작한 건 사실이었다. 결혼한 지 5년이 되면 결혼 선물로 받은 이불마저 너덜거린다. 새 이불을 사야 할지, 아기를 가져야 할지, 상대의 광기를 영원히 감수하며 살지 아니면 결혼의 망령을 버리고, 이불도 내다버리고,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시작해야 할지 결정할 때가 온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의 실패가 준 불행으로 정신분석의가 없으면 불안했던 그녀는 정신과의사 베넷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헛헛함과 외로움을 느끼고 그녀의 내제되어있는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두 번째 결혼생활이 지루해질 무렵 나타난 에이드리언이라는 남자의 등장으로,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외에 결혼이 질식시키는 또 다른 욕망들은 어쩌란 말인가? 탁 트인 길을 달려보고 싶은 욕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욕망, 숲속 오두막에서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욕망은? 그 욕망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연극 무대에서 입는 말 의상의 뒷다리처럼 오랜 세월 반쪽으로 살았으나 여전히 나 자신이 온전한 인간인지 알아보고 싶은 욕망이다.

  결혼한 여성이 가져야할 책임과 의무, 사랑에 대한 갈증 뿐만이 아니라 나이듦과 그에 대한 두려움 등 여성들이 느낄법한 정체성의 혼란과 욕망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한 나의 대처법은 (적어도 아직은) 바람을 피우지 말고, (적어도 아직은) 탁 트인 길을 내달리지 말고, 대신 나의 ‘지퍼 터지는 섹스Zipless Fuck’의 환상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지퍼 터지는 섹스는 단순한 섹스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 이상향이다. 지퍼가 터지는 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 지퍼가 마치 장미 꽃잎처럼 떨어지고 속옷이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기 때문이다. 혀들이 뒤엉켜 액체가 되고 영혼 전체가 혀 밖으로 흘러나와 연인의 입으로 들어간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한 사회적 잣대들이 여성들을 괴롭힐 때 이런 소설이 여성에 의해 발표되었다는 것 자체가 해방감을 맛보게 했다. <비행공포>에는 아주 노골적이고 솔직한 성적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야하다라는 느낌보다는 속시원한 느낌을 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 나도모르게 타인의 시선이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적 표현이 정말 적나라 했기에) 당시 폐쇄적이던 시대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드러낸 점, 그리고 그 내용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참 맘에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와 남편은 항상 정신분석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머리 위에 정신분석의들을 앉혀놓지 않으면 아주 사소한 결단조차도 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머리 위에서 제우스와 헤라가 싸우고 있는 《일리아스》의 트로이 병사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결혼은 하나의 ‘메나주 아 카트르’가 된다. 침대 위에는 나와 나의 분석의, 남편과 남편의 분석의 네 사람이 누워 있다. 분명 X등급을 받을 장면이다. p.24

진정한 의미의 지퍼 터지는 섹스를 하고자 한다면 상대를 잘 알아선 안 된다. 내가 깨달은 바로는, 한 남자와 친구가 되고 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아내에 대한, 혹은 전처에 대한 불평을 들어주고, 그의 어머니와 아이들에 대한 불평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그에게 느낀 매력은 사라져버린다. 물론 그를 좋아하게 되고, 어쩌면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열정은 사그라진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 열정이다. 또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의 열정을 몰아내는 또 하나의 확실한 방법은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다. 그의 안면 경련이나 찌푸리는 모습 같은 것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의 성격을 낱낱이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핀으로 고정된 곤충이나 오려서 비닐에 넣은 신문기사가 된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고 그를 존경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그는 나를 한밤중에 전율을 느끼며 깨어나게 만들지 못한다. 더 이상 나는 그의 꿈을 꾸지 않는다. 이제 그는 얼굴이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지퍼 터지는 섹스의 또 한 가지 조건은 바로 간결함이다. 익명성이 보태어질 때 그 간결함은 더욱 빛난다. p.33

결혼이란 게 뭔지 알고도 대다수의 여자들은 여전히 결혼했을까? 남편의 직장이 바뀔 때마다 남편을 따라 다니는 젊은 여자들을 생각해본다. 갑자기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여자들. 일거리도 없고 말도 통하지도 않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여자들. 외로움과 따분함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아이를 낳는 여자들. 늘 피로하고 지쳐 있는 남편들. 결혼 전보다 서로를 못 만나는 부부들. 섹스하기에는 너무 지친 몸으로 침대에 쓰러지는 두 사람. 서로를 유혹할 때는 상상조차 못했을 정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진 두 사람. 환상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남자는 열네 살짜리 섹시한 비키니 소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자는 TV수리공을 갈망한다. 아기가 아프면 소아과의사와 바람을 피운다. 남자는 〈코스모폴리탄〉을 읽으면서 자기가 굉장히 세련된 여자라고 믿는 어린 여비서와 섹스한다. 문제는 결혼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가 아니라, ‘언제 한 번이라도 옳았던가?’이다. p.153

그 순간 나는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과 함께 빈에서 그를 갈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후들거리는 무릎. 출렁거리는 뱃속. 질주하는 심장. 거친 호흡. 그가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켰던 그 모든 감정들이 나로 하여금 그를 따라나서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침대 밑의 남자는 절대 침대 위의 남자가 될 수 없어. 그들은 상호배타적이야. 일단 모습을 드러내면 내가 갈망하던 그 남자가 아니야.” p.486

비행공포

저자 에리카 종

출판 비채

발매 2013.10.21.

상세보기

책 소개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에리카 종의 문제작!
에리카 종의 장편소설 『비행공포』. 네 번의 결혼과 거침없는 성적 상상 등으로 격렬한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로 저자의 자전적 요소가 담겨 있어 가족과 의절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여성은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거대한 질문을 던지며 가장 수치스럽고 은밀한 생각들과 감정, 그리고 경험 모두를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이사도라 윙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완전히 발가벗긴 자신을 묘사한다. 당혹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이사도라의 성적 모험담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보다 새로운 여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자아를 확립하고자 한다. 여성으로서, 화가로서, 사랑이 필요한 개인으로서, 섹스가 필요한 개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아내로서의 자아를 조화시키려 애쓰며 자아를 탐구해가는 과정을 엿보며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저자 : 에리카 종
저자 에리카 종은 시인이자 소설가. 194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컬럼비아 대학의 바너드 칼리지에서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대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하여 1971년 첫 시집 《과물과 식물》 등 다수의 시집을 펴냈다. 대학에서 만난 첫 남편과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정신과의사이자 중국계 미국인인 남편 아랑 종과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서 생활했다. 무역상 아버지와 화가 집안의 어머니, 레바논 남자와 결혼한 언니, 대학원의 악몽, 남편과 함께 참석한 학회, 끝내 떨칠 수 없는 나치의 그림자와 결혼의 굴레… 에리카 종은 이 모든 자전적 요소를 생생히 담은 이야기를 남몰래 써서 출간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1973년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비행공포》이다. 그후의 삶은 에리카 종의 말을 빌리자면, “욕설을 담은 협박편지와 찬사를 가득 담은 편지들이 동시에 쏟아지는 나날”이었다. 이 책은 신페미니즘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등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으며 지금까지 총 2700만 부가 판매되었고 [타임]이 뽑은 1970년대TOP10 도서에 선정되었다. 1979년 출간된 한국어판 역시 당시 베스트셀러 1위를 연일 석권하며 이후 40년 동안 《날으는 것이 두렵다》 《침대 밑 사나이》 《나의 안티히어로와의 여행》《꿈의 회의로부터의 보고》 등 다양한 제목으로 열 가지가 넘는 판본이 출간되었다. 《비행공포》는 저작권사와 정식 계약한 최초의 한국어판이다. 그밖에 소설가인 조너선 패스트와의 세 번째 결혼생활을 낱낱이 담은 소설 《How to Save Your Own Life》 《Parachutes and Kisses》 등을 출간했고, 지금의 남편인 케네스 버로스와 결혼한 후에는 《It Was Eight Years Ago Today》 등 다양한 논픽션을 출간하기도 했다. 1975년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학상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도빌 문학상을, 이탈리아에서 페르난다 피바노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7년, 밥 딜런은 그의 신곡 ‘Highlands’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녀가 물었지. 그럼 요즘은 어떤 책을 읽어? 나는 대답하네. 에리카 종.” 얼마 전, 에리카 종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15분의 명성을 얻었고 지금 더없이 바쁘다. 그러나 15분 후에는 어쩔 것인가?” 이는 한 권의 소설을 출간한 후 다시는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던 에리카 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치열하고 당당한 삶을 통해 15분을 40년으로 바꾸었다. 현재, 미국에 살며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등 활발한 활동과 강연을 펼치고 있다.

역자 : 이진
역자 이진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다가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립학교 아이들》《열세 번째 이야기》《잃어버린 것들의 책》《꽃으로 말해줘》《658, 우연히》《악녀를 위한 밤》《갈림길》 등 6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영미문학 텍스트에서 빈번하게 마주친 《비행공포》를 읽고 깊이 매료되어 저자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등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정식 한국어판을 번역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우수한 영어권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 소개할 계획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작품 소개 두려움 없이 쓴 소설, 두려움 없이 옮기다

1 꿈의 학회 혹은 ‘지퍼 터지는 섹스’로 가는 길
2 “여자는 독재자를 숭배한다.”
3 똑! 똑!
4 검은 숲 가까이
5 꿈의 학회 혹은 성교에 관한 보고서
6 열정 발작 혹은 침대 밑의 남자
7 신경성 기침
8 빈 숲의 통화
9 판도라의 상자 혹은 나의 두 엄마
10 프로이트의 집
11 실존주의, 이대로 좋은가
12 미친 남자
13 지휘자
14 아랍인 그리고 기타 짐승들
15 영웅답지 않은 영웅과의 여행
16 유혹당하고 버려지다
17 꿈 작업
18 피의 혼례 혹은 시크 트란시트

작품 해설: 날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예스24 제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