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 정권은 재벌을 만들고 재벌은 권력을 지배한다
안치용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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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외래어가 혼재한다. 텔레비전, 라디오, 컴퓨터와 같은 외래어를 한글로 대체할 만한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비록 외국에서 건너온 말이지만 한국어의 일부가 되었다. 외래어는 타 국가, 대부분의 경우 선진국의 말들이며 그들이 가리키는 선진 문물과 함께 우리나라로 건너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선진국을 상대로 수출한 단어가 있다. 바로 재벌이다. 인터넷 한영사전에 재벌을 검색하면 영어로 chaebol 이란 결과가 나온다. 대규모 복합 기업이라는 뜻의 conglomerate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재벌이란 개념은 그 발음이 영어로 표기된 채 영어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나라의 단어로 대체될 수 없으며 최선의 대체는 그저 그 단어의 발음을 각 나라의 언어로 표기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인 셈이다. 하지만 재벌이 다른 나라의 다른 단어로 대체될 수 없는 영광을 가진 데에는 한국 자본 권력의 영광스럽지 못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한국 경제역사를 꿰뚫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로서, 타 국가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외생적 자본주의와 정경유착으로 인해 주요 재벌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로 떠올랐고 그들이 정치 경제 사회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존재해왔다. <한국 자본 권력의 불량한 역사>는 해방 후 정국에서부터 군사정부와 문민정부를 거친 비교적 최근 시기까지의 한국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의 뿌리 깊은 유착의 역사를 되짚는 방식을 통해 이러한 분석들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제시한다. “희망 자체보다는 희망의 근거를 찾는 일에서 희망 부재의 타파를 모색해야 한다는 서문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금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근원을 찾고 범죄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며 시장 사회로의 합리적 이행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한다.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시작은 철저히 외생적이었다. 일본에 의해 중앙은행이 설립되었고 수많은 일본 기업들이 경제를 침탈했다. 광복 후 한국 전쟁을 거치며 미군정에 의한 적산분할과 원조물자로 인해 한국인 기업가들이 생겨났다. 대한민국에 관해서 철저히 외부 세력이었던 미 군정은 적산분할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 관료들을 흡수했다. 따라서 적산을 기반으로 재벌의 토대를 닦은 기업가들은 친미 친일 우파 세력과 유착 관계를 맺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업가들 중심의 경제 세력과 이승만 중심의 정치 세력은 끈끈한 연결을 맺고 지향점 없이 생존을 위한 반대만으로반공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일제강점기에 위세를 누리던 친일파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이념을 위한 이념의 등 뒤에 숨어 또다시 지배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정치 세력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며 부정 축재를 계속해오던 기업가들은 박정희의 친 재벌정책에 힘입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국가 외부에 보호막을 치고 내부에선 먹잇감을 몰아주어 집중육성하는 정책을 통해 기업가들, 특히 재벌들은 시장을 독과점할 수 있었다. 외국 기업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부재했기 때문에 시장을 먹어 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국가가 나서서 특정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현상은 선 성장 후 분배라는 경제 근대화 정책에 의해 빛깔 좋게 포장되었다. 이처럼 기업의 방향과 성장이 철저히 국가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박정희의 오랜 꿈을 위해 재벌은 부국강병이라는 공적인 목적을 위한 사적 기구가 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면서 정경유착은 더욱 심화하고, 정치와 경제 권력 주체들이 국가를 주무르는 밀실 정치 시대의 막이 오른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부터 몸집을 크게 불리기 시작한 재벌은 더 이상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본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은 취약해졌고 자본이 국가를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모했다.

압도적인 생산능력과 고용을 통해 빠른 속도로 자본을 축적해 나갔던 재벌은 외환위기를 겪으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외부 개입자인 IMF에 의해 왜곡된 금융시장과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해야만 했다. 국가가 주도한 자본주의가 실패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의 득세를 이끌었다. 국가가 배제된 채 시장이 절대 권력을 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오직 효율성만이 진정한 가치이며 도덕성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부도덕한 시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장경제는 어느새 사회 자체가 시장이 되는 시장사회를 촉발한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은 금권이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아있는 시장사회에 도달했으며 금권은 곧 재벌이다. 이 불량한 자본 권력이 한국 사회에 채운 쇠사슬을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제시하는 새 시대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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