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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 병이 공짜 ㅣ 문학의전당 시인선 118
임희구 지음 / 문학의전당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한 권의 시집으로 그 시인의 내면을 짐작해보는 것은 독자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임희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에서 나는, 그가 날것의 이미지를 자신의 철학으로 육화시키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존재감과 철학을 이렇게 쉬운 언어로 강렬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표제시 <소주 한 병이 공짜>를 옮겨본다.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시인은 금주를 결심했는데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병이 공짜'라니, 실로 만상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는 감자탕이라는 안주를 에워싼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술자리에 들 수 없음은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음이며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음은 곧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질게 끊어야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금주는 고립이다. 시인은 소통의 단절을 원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곧 자신이 무너지고 말 것이란 걸 예감한다. 얕고 얕은 것은 그의 가벼움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끊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성에 대한 시인의 인정스러움과 익살로 느껴진다.
어느 세탁소엔가
맡겨놓고 찾지 않은 옷이 있을 것만 같다
책갈피에 꽂아둔 편지를 잊은 채
책과 함께 떠나보냈을지도 모른다
까마득히 잊고 보내지 못한 답장들
까마득히 잊혀져간 인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이제는 너무 멀리 지나쳐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는데
문득문득 떠오르는 쪽지 같은 것들
-<마흔>
이 시를 읽을때 마음이 뭉클해졌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미처 돌아봐주지 못한 인연들이 많다. 버려지지 않는 것들때문에 올바른 시선을 얻지 못한 시간들도 많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연들은 자꾸 변방으로 가버리고 나역시 이 변방이 전부인듯 살고 있다. 우리 서로가 두터운 껍질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두고온 지나간 인연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시<마흔>, 마흔 즈음엔 버린 것들에 밀려 조용히 눈물을 머금어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임희구 시인의 시에는 대체로 추상성과 머뭇거림이 없다. 시인의 정서와 인간의 무대가 달리 장치되거나 조작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시를 다 읽고나자 나는 문득 생존본능을 떠올렸다. 인간의 뇌는 극한 상황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인데 그의 시들이 그러하다. 위기에 변환되는 인간의 생존모드, 그는 쉴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그 생존모드에 체제에 돌입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경험과 사유로 철저하게 무장된 그의 언어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타인들에겐 쉬웠겠으나 본인은 얼마나 뜨거웠겠는지를 이해하는 중이며 사람냄새 가득한 시집에 박수를 보내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