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양장) - 진리, 성경, 역사, 해석
앤터니 티슬턴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어머니의 심정으로 읽는 조직신학]

‘우리의 신학 탐구와 진리 탐구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이 모든 영역을 활용해야 한다.’(59p)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쓸모있는 것들을 자주 주워오셨다. 장난감부터 가구까지. 길가에 버려진 그럴듯 한 것들이라면 뭐든 주워오셨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우리 아버지에게 ‘쓸모’의 기준이 보통 사람의 것들보다 훨씬 넓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여온 물건 중에는 정말 쓸만한 것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그대로 쓸수 없어 버려진 것들도 많았다.
.
굳이 티슬턴을 비판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의 눈에는 쓸모의 범위가 너무 넓다는 것. 너무 많은 것을 주워담는다는 것이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 범위가 거의 무한해 보인다. 서론에서 티슬턴이 조직신학 작업을 위해 양손 가득 ‘주워담은’ 학제들(성경신학, 교부학, 철학, 역사학, 화행이론, 해석학, 사회학, 문학이론 등), 사상가들, 개념들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티슬턴은 조직신학이라는 집으로 이 온갖 것들을 들여온다.
.
신학 탐구와 진리 탐구를 위해 이 모든 영역을 다 활용해야 한다는 티슬턴의 문장 속에서 현관문 앞에 잡동사니를 한아름 들고 선 아버지의 설렘이 느껴진다. 어린 아이들은 이 잡동사니에 흥분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 할 것이다. 그러나 집에는 아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의 잔소리(‘대체 이걸 다 어디에 두자는거야?’)와 등짝 스메싱도 기다리고 있다. 대게 ‘정리’와 ‘사용’은 다른 사람(주로 어머니)의 몫이기 때문에.
.
나는 초등부 전도사임을 밝힌다. 그러니 나는 어머니인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어머니 된 심정으로(한숨과 약간의 현기증과 더불어) 이 책을 읽은 셈이다. 아버지에게 재미있는 물건들일수록 어머니의 눈에는 처치곤란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이런 류의 책을 읽고 그럴듯한 서평을 쓸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초등부 전도사여서가 아니라 사회과학대학에 적을 둔 인류학도이기 때문이다.
.
마르셀 모스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그는 증여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하고, 근래 신학계에서는 바클레이의 Paul& Gift라는 역작을 통해서 잘 소개되었다. 전 세계가 community(공산주의, 사회)와 individual(자유주의, 개인)이라는 이념으로 두동강이 난 20세기 중반. 전쟁의 불바다와 역사의 막다른 길 앞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는 다름아닌 사회와 개인이라는 이념의 화해였다. Seasonal Variation of the Eskimo라는 민족지 연구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에스키모인들의 계절은 여름과 겨울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여름에는 자유주의(개인)적으로 살고 겨울에는 사회주의(집단)적으로 살아간다. 여름과 겨울의 극명한 두 계절에 상응하여 이들의 법체계, 도덕 양식, 종교 형태, 경제 또한 달라진다. 이 두 계절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한 계절이 다른 한 계절의 삶의 형태를 잡아먹지 않으며 침범하지 않는다. 여름은 겨울을, 겨울은 여름을 서로 그리워하고 기다린다.
.
(사회적)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모스에게 있어서 개인이라는 가치와 집단이라는 가치는 서로 죽이고, 척을 지고, 한편이 다른 한편을 버리고 밀어내고 잠재워야 자신의 모습이 확연해 지는 그런 가치가 아니다. 둘은 다르지만 공존 가능하며, 이 둘 모두가 (사회적)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것이 모스의 메시지였다. 마르셀 모스의 저작에 대한 정치적 함의가 이와 같다면, 사회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사회에 생태(계절)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모스는 ‘사회’라는 집에 생태(자연)를 들여옴으로서 ‘사회적인 것’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
모스로부터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집(사회)에 생태를, 자연을 들이는 것. 이를 통해서 더욱 더 집(사회)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신학으로 돌아와서, 신학이라는 집에 현대철학을 들이는 것. 언어 이론을 들이고, 사회학을 들여오는 것이 필요한가? 필요한 정도가 아니다. 첫째로, 들이지 않으면 망가질 것이다. 이분법으로 갈려서는 안될 개인과 집단이라는 가치로 전세계가 갈라졌던 것과,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는 얼마나 비슷한가? 실천신학과 이론신학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티슬턴은 들여옴의 전략으로 이분법을 허물고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화해하기 위해서는 들여와야 한다.
.
둘째로, 들이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할것이다.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언어 일색의 신학 작업은 모순적이게도 신학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다. 21세기에 기독교제국(christendom)에 살며 신학하는 신학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면몰수를 하지 않고는 신학적 언어만으로 진정한 의미의 신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신학 용어를 사용하는 신학자 자신이 신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속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존재임이 폭로되었다. 화해하지 않는 신학, 안면몰수의 신학은 그 의미를 상실하며 신학의 종말로 곧장 나아간다.
.
따라서 분명 신학 작업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들여옴으로 우리는 더 ‘신학적’이 되는 지점이 있다. 나는 모스의 글에서 느껴지는 시대적 절박함과 문제의식이 티슬턴에게도 있다고 믿는다. 이런 문제의식과 절박함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 불경시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신학의 이런 ‘차용’이 낯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신학은 시작할 때부터 낯선 무언가를 들여옴으로 시작되었다. 신학의 역사는 낯선 언어와, 낯선 철학에 대한 ‘들여옴의 역사’이자 ‘대화의 역사’가 아닌가?
.
천 페이지가 넘는 고린도전서 NIGTC 주석을 쓴 사람이 조직신학 책을 썼다고 했을 때, 그걸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런 신학자가 있다는 것은 신학이라는 우리 집안에 또다른 천재, 괴짜, 사기캐가 있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티슬턴은 감당 안되는 아버지 그 이상이다. 신학이라는 집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집안에서 앞으로도 밥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런 감당 안되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21세기에 신학을 신학답게 하는 것은 이런 아버지의 심정이다. 그는 길가에서 주워온 온갖 것들을 집안에 늘어놓고서 겸손하게도 “신학 탐구와 진리 탐구의 ‘활력’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혹은 ‘생존’이라고 읽는다. 집안의 활력과 생존을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한말씀 드리고 싶다. 혜나를, 아니 ‘사회’를 집에 들이시라고. 마지막으로 티슬턴에게도 한말씀 드리고 싶다. 감사하다고. 물론 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가진 초등부 전도사이지만서도.

**본 서평은 IVP 독서 서평단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