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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게모노 25 - 완결
야마다 요시히로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이니, 세키가하라 전투니, 시마즈 류쿠 전투니, 이래저래 일본 미디어를 보다 보면 피해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좋든 싫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주치게 되는 그들의 천하를 둘러싼 역사로, 누군가에겐 죽고 못 사는 장엄한 대하극이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이름만 들어도 피로할 뿐 그다지 흥미로운 배경이자 소재는 아니다.
원체 역사 소재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는데, 전국시대의 경우는 특히 어린 시절 삼국지, 초한지처럼 어떤 조기 교육을 이끌어줄 미디어를 접하지 못한 매우 매니악한 분야.
‘불행스럽게도’ “효게모노”는 그 아주 매니아적인 전국시대의 40여 년을 수십 명의 인물과 장장 25권 분량에 걸쳐서 그리는 피곤한 대하사극이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영웅호걸들이란 필연적으로 피로한 존재들이다.
고지식한 엄숙주의와 명예와 죽음의 숭상, 숨 막히는 충성과 위계…
물론 그런 정통적인 인물이 주는 진득한 맛 위에 더해, 소위 ‘캐릭터’가 살아있는 입체적인 역사적 인물의 존재감과 매력은 더욱더 돋보이고 수백 수천 년을 넘어 독자들을 매료한다.
역사 소재를 좋아하건 말건, 노도와 같은 역사 속을 살았던 이야기 속의 인물에게 느껴지는 인간적인 면이라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인 즐거움이므로.
그렇기에 나관중 이후 많은 역사의 엔터테이너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해석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던 것이리라.
후루타 오리베.
그 유명한 “센고쿠” 시리즈나 “전국무쌍” 게임에도 딱히 안 나오는 인물.
전국시대의 세 천하인이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연달아 주군으로 섬겼으나
다이묘, 무장으로서는 별볼일없는 인물이었다 하니 결국 전장의 카타르시스를 줄 수 없어 캐릭터로서 주목도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
“효게모노”는 철저하게 이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그려낸다.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 후루타 오리베의 정체성은 전국시대의 전통적인 세일즈포인트인 무장도, 다이묘도 아닌,
속 좁고 우스꽝스러운 풍류객. 예술인. 수집가. 속물.
작가가 생각한 작품과 시대를 관통하는 조금 더 포괄적인 키워드는 욕망, 그 자체.
천하를 지배하고 싶다,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고 싶다, 이름을 남기고 싶다, 출세하고 싶다, 명물 그릇을 가지고 싶다, 나의 취향만으로 이 나라를 물들이고 싶다, 저 새끼를 담그고 싶다, 당대의 셀럽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결국 난세의 수많은 인물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잘나가고 싶다’는 욕망.
크고 작은 욕망이 표면적으로 드러나 대결하는 곳은 건곤일척의 전쟁, 혹은 구밀복검의 정쟁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욕망끼리 엇갈리고 설득하고 우회하는 밑작업이 이루어지는 곳, 재패니즈 티파티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전국시대의 티파티, 다회를 관통하는 축이 되는 인물로 후루타 오리베를 선택한 작가의 배짱은 완벽한 수였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상위 계급, 그 계급이 향유하는 트렌드, 그 트렌드 안에 숨은 컬쳐 코드, 그 코드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과 철학.
그 시대에도 트렌드세터가 있었음을, 도태된 패션과 힙스터들의 유행이 있었음을,
먹어주는 바이럴이 있었음을, 픽 하나로 군중이 원하는 것을 정할 수 있는 인플루언서가 있었음을,
이 만화는 과감하게 역사를 바꿔가면서까지 집요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살벌한 시류의 고지전에서 경망스러운 삼십대 아저씨가 고희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멋과 예술에 대한 솔직한 욕망을 발견해,
그것을 일본의 문화사와 미의식에 깊게 남기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효게모노”는 철과 피가 천하를 재단하던 이 시기에 진흙과 차로서 천하를 끝내 움직였던, 거대한 역사 한가운데를 살았던 어떤 철없는 속물이 시대를 주름잡는 천하의 풍류인이 되는, 역사서에 숨긴 문화예술에의 빌둥스로망이다.
정사는 줄 수 없는 야사만의 짜릿함, 다른 곳에서는 본 적 없는 과감한 시각에서의 재구성, 잔인할 정도의 소프트 파워 예찬, 이를 아우르는 성장물의 장르 문법.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을 리가 없다.
후루타 오리베가 찾은 그의 세계란 그의 차 스승 ‘센노 리큐’의 와비(わび) 철학과 같이 간소하고 절제하는 엄숙한 한거의 미니멀리즘과 대비되는, 그 자체를 즐기는 가벼운 즐거움,
엄숙한 갑(甲)에 반발해 ‘흐물떵‘ 휘어지는 을(乙), 한바탕 웃어넘길 수 있게 하는 일소(一笑).
그것을 묶는 우스꽝스러운 효게(ひょうげ).
그것들은 물건의 형태를 가지고, 명물에 대한 재치있는 찬미로 이어진다.
˝효게모노(ひょうげ者, 웃기는 녀석)˝
작가가 예술인으로서(혹은 예술인에게 휘말리게 된 비예술인으로서) 그려낸 전국시대 무장들의 투쟁은 이런 철학에 맞게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그 어떤 대배우라도 이런 표정과 감정을 만화의 그것만큼 옮겨낼 수 없다. 이런 박력은 만화에서만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런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박력을 만화계의 을장(乙將), 야마다 요시히로 작가보다 잘 그려낼 수 있는 작가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건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속물들의 욕망이 극으로 갔을 때, 그것이 정치, 사회, 문화, 삶의 양식에 스며들어 수 백년이 지난 후에 남는 예술과 의식이 되는 것임을 독자는 설득당한다.
이보다 낭만적인 배물주의가 또 있으랴…
21세기의 대중문화를 즐기는 풍류객과 그 당시 천하의 통치이념에 연결지어 목숨 걸던 풍류객의 풍류란, 분명 다른 것이지만…
책장과 수납장의 먼지를 털며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맞는 작품들을 채워넣고, 추가하고, 바꿔가는 일을 후루타 오리베의 행적과 겹쳐보는 것은 조금 과장된 호들갑일까?
하지만 이 정도의 만화를 보고 나면 이런 민망한 자의식 과잉이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다르 이 레세베르(기브 앤 테이크),
독자들이란 이런 작품을 보며 무엇 하나로 꼬집을 수 없는 것들에게 사랑을 느끼고 작가와, 세상과 교감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예술의 자리를 그려낸 만화가 그 자체로 그런 예술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 걸 보는 경험은, 살면서 그리 자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인공 후루타 오리베가 그토록 바라던 일소 끝에 찾아오는 소복의 세상이 여기에 있다.
효게의 미학이 합쳐진 명물이 다시, 만화로서 여기에 있다.
‘불행스럽게도’ “효게모노”는 아주 매니아적인 전국시대의 40여 년을 수십 명의 인물과 장장 25권 분량에 걸쳐서 그리는 피곤한 대하사극이다.
더이상 이 만화의 다음 권을 (정발 주기를 투덜거리며)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불행한 일이다.
세상에는 어떻게 해서든 전해져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 있다.
이 만화는 그런 작품이다. 볼멘소리도 많이 했지만, 길고 길었던, 전 25권의 여정을 마친 문학동네(舊 애니북스)에게 감사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