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장 / 구운몽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얼굴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들과 시시덕 거릴 때의 얼굴과, 혼자서 자기로 돌아왔을 때의 얼굴과.' 만약 이 두 얼굴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대개는, 방안에서의 자기만의 얼굴을 지키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대인(對人)모드(?)로 낯을 바꾼다. 나 혼자 존재하는 곳을「밀실」이라고 한다면, '밖에서의 나' 여럿이 있는 공간은「광장」이다. 이 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몸을 던진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 문제집의 단골 지문 중 하나였던 최인훈의「광장」, 이 소설을 이제서야 읽었다. 지문 옆에 붙어있던 조그만 글자 몇 개, 「이 글의 특징 : 사변적, 관념적」, 이걸 보는 순간 이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싸~악 가셨고, 적어도 몇 년 동안 그것은 유효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이 작품은 정말 너무 너무 재밌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감동적이다. 우리나라 소설 읽은 것은 몇 안 되지만, 그 중 최고로 단편은 김승옥의「무진기행」, 장편은 이 소설을 꼽고 싶다. 읽는 내내 흥분과 전율을 느꼈다.-_-;; 아주 아주 오랜만에...
주인공 이명준은 자신만의「밀실」에 안주하지 않고,「광장」으로 나가 둘과의 조화를 꾀하여 보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남한 사회는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으며,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은', 그런 곳이다. 해방 후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당하는 그는, 사랑하는 윤애에게서 잠시 위안을 얻지만,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지 못하고, 밀실에서 광장으로 통하는 길은 이어지지 못한다.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낀 명준은 돌연 월북한다.
그러나 이북 또한 그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데...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당'이 주인공이고,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하며, 자기들은 복창만 하는' 그런 로봇 같은 사회. 밀실은 존재하지도 않고, 광장은 거대하나 사람들은 거대한 힘에 밀려 움직이는 피폐한 살덩이에 불과하다. 북한은 미친 믿음이 무섭고, 남한은 숫제 믿음조차 없는 허망한 곳이다. 북한에서도 그에게 운명처럼 나타난 여인이 있으니, 그 이름은 '은혜'였다. (얼핏 들으면 윤애와 비슷하다-_-) 명준이 광장에서 입고 돌아온 상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은혜의 사랑으로 아물어갔다.
그러던 중 6.25 사변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서도 명준과 은혜는 광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동굴로 들어가 둘만의 사랑의 유희를 즐긴다. 그러나 명준의 아기를 밴 은혜는 폭격으로 끝내 사망한다. 포로가 된 이명준. 남과 북에서 모두 자기네 나라로 올 것을 설득하지만, 그는 이 말만 내뱉는다. '중립국'. 중립국 인도로 향하는 타고르호에 몸을 실은 이명준.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란 중립국 뿐만 아니라, 지상 어느 곳에도 없을 거란 생각에 비창함을 느끼는데... 출발하는 순간부터 배의 마스트에 앉았다 또 날았다 하면서 그를 뒤쫓아 오는 크고 작은 갈매기 두 마리가 신경 쓰인다. 언제나 자기를 쏘아보는 것 같은 그 눈빛이 두려워져 총으로 겨누어 쏘려는 순간, 은혜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이 떠오른다. 그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가, 은혜가, 그리고 자신의 딸이 기다리고
있는 넓고 넓은 바다로...
작가는 이 소설을 여섯 번이나 고쳐 썼다. 이 소설에 대한 그의 애착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좌우 이데올로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나.. 작가는 존재하고자 하는 실존의 몸부림, 인간의 영원한 의무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무겁지만 재밌는 소설,「광장」...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읽는, 몇 안 되는 소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