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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비자 ㅣ 창비세계문학 36
안나 제거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마르세유의 어느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래된 항구의 모습이 보이는 곳에 테이블이 하나 있다. 그 자리에 항구를 등지고 앉으면 피자를 불에 굽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테이블 위에 로제 와인 한 잔을 두고 그 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게 자리를 권했다. 피자를 굽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자신과 나란히 앉고, 항구를 보고 싶다면 맞은편에 앉으라고. 딱히 피자를 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처음 마주하는 그 사람과 나란히 앉는 것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애초에 그 자리에 앉는다면 항구를 바라보고 앉을 생각이었는데, 이 사람은 내게 의견을 물어 놓고서 자기 옆자리를 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별수 있나, 그래서 항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그 사람과 마주했다.
그는 대뜸 이야기를 시작했다. 몬트리올호가 침몰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 배에 타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배에 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심드렁하게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피자를 먹었다. 사실, 그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로제 와인과 잘 어울리는 갓 구운 피자가 먹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작가의 가방을 얻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먹던 피자를 내려놓았고, 그가 그의 가방을 연 순간부터는 와인 잔도 내려놓았다. 그는 가방을 가지고 이곳 마르세유로 왔다고 했다.
나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가방을 가지고 마르세유에서 지금까지 머무르면서 겪었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혹시라도 그가 말을 멈추고 가 버릴까봐 나는 항구에 노을이 지는 때가 천천히 오기를 빌었다.
출국병자들이 갖가지 증명서를 받아 떠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마르세유에, 이 남자는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마르세유에 있으려면 그가 이곳을 떠날 사람이라는 증명이 필요했다. 우연히 얻게 된 그 가방은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가방은 그에게 출국병자들이 그렇게 갖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것들을 주었다. 그저 마르세유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그에게 나타난 한 여자는 그를 바꾸어 놓았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그는 떠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떠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침몰했다는 몬트리올호에 탔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그 배에 타지 않았다. 아직도 그는 그녀가 떠나버린 마르세유를 떠나지 않았고, 여기 이 자리에서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그가 가진 몬트리올호의 표도, 그를 그 배에 오를 수 있게 해 줄 통과비자도 쓰지 않은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도 궁금하겠지. 그가 가방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는지, 그런데 왜 떠나지 않았는지. 분명히 내가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건 가방 속의 이야기 때문이었고, 나중에는 가방이 만들어준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었는데,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하려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그에게 직접 듣는 것이 더 나을테니까.
나는 그냥 내 넋두리를 몇마디 해 보려고 한다. 내가 그를 만난 그 카페에 당신을 데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대신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당신을 초대하려 한다. 거기에는 로제 와인과 피자는 없다. 대신 향기로운 차 한 잔과 스콘 몇 조각은 드릴 수 있다. 나는 말 재주가 없어 긴 얘기를 하지는 않을 거다. 그저 몇마디만 들어 주시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와 함께 떠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출국병자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일상을 계속 마주한 것이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가시가 되어 걸려 버렸다. 지금 내 삶에서 사라진 일상을 그 사람들에게서 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상을 잃었고, 결국 자신마저도 잃어버렸다. 내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적어도 그는 일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어서였다.
지금 당신의 일상은 어떤지를 묻고 싶다. 그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놓쳐버렸는지.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일상이 떠라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당신이 일상을 보내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니까. 일상이라는 게 언제나 과거와 같을 필요는 없다. 돌아갈 수 없다면, 되돌릴 수 없다면 또 다른 일상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웃기겠지만, 그냥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 내가 잃어버린 일상을 다시 찾으려면, 아니 일상을 다시 새로 짜맞추려면 누군가에게는 이 말을 해야할 것 같아서.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
몬트리올호가 다까르와 마르띠니끄 사이에서 침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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