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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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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적 없이 사랑한 얼굴 앞에서,

그것이 진정 그 얼굴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울고 싶어졌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게 한다.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공연은 시간이 흐르면 소멸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붙잡으려 해도 쉽게 잊히고 고통과 불편함은 오래도록 남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은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우리 삶으로 기꺼이 끌어들이는 방식, 그리고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고백한다.

 

목정원은 오래전에 보았던 연극 돈 지오반니가 공연장에서 자신을 노래하게 했음을 회상한다. 그러나 관객이 주체가 되었던 그 기쁨과 충만함을 배제하면 강간과 살해를 일삼은 주체가 자유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우리에게 폭력이 아닌지 자문한다.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남겨주기 위해 공연예술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눈을 감으시던 날을 떠올린다. 서로에게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 노래를 이어가던 그날의 잔상을.

 

이 글을 읽고 한동안 콜포비아(전화 공포증)에 시달렸던 나를 떠올렸다. 전화 너머 상대가 내게 화를 낼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 전화를 끊으면 그가 사라질 거라는 공포에 떨었던 나날과 저자의 기억이 겹쳐지며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사라지지만 당신들은 울음을 계속 우세요. 나와 당신들이 외면하지 않은 세계의 아픔에 대해.”(88)

 

목정원의 작업은 멀리 있던 공연예술을 우리 삶 가까이로 가져왔다. 아름다움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본 적도 없고 이미 흘러간 것을 사랑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름다움을 향해 노래하는 우리는 이전과 다른 길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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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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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김영하, 백수린, 겨울서점 등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단편소설의 정수로 자리매김해왔다. 이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작품 속의 한 문장으로 응축된다. “형은 내게 등을 돌리고 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형이 옷을 입고 있을 때, 나는 형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140) 그의 작품의 인물들은 등지고 서서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지만 모두 상처가 있거나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울음을 포착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한 땀 한 땀 직조해나간다.

 

작품을 덮고 나면 헛헛함과 함께 먹먹한 감정이 밀려오는데 이때 내가 떠올린 것은 부재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 텅 빈 공간을 기억이 대체하지만 그 기억의 너머의 진실은 좀처럼 파악할 수 없다. 실체 없는 이야기들은 사랑과 함께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인물들의 고독을 더욱더 극대화한다.

 

사랑니를 뽑으려고 간 치과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코네티컷을 읽었다. 아직 뽑지도 않은 이가 아려왔다. 이 단편들이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이상한 사랑의 한 형태라면, 대책 없는 고통에 떠밀리더라도 기꺼이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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