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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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윈은 이 일이 좋다고 생각했다. 밭에 가서 농사일을 하는 것에 비하면 햇볕에 그을리지도 않고 땀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아윈은 이 일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보고 “와, 예쁘다.”라고 말하는 물건을 만들어내려면 이렇게나 많은 나비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죽은 나비 날개로 만든 그림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건 그의 상상을 조금 벗어났다.
...
아윈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선 늘 살아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만나곤 했다. 대부분은 나비 그림에게 흰색 물감 대용으로 쓰는 흔한 배추흰나비였다. 제일 값싼 나비였다.
...
“찢어진 나비는 가치가 없어.”
나비 사체를 정리할 때면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아윈은 ‘가치’가 무슨 뜻일까 생각했다. 아버지 머릿속에서 흰네발나비 한 마리는 1엔이고, 당시 공무원 월급은 대만 돈으로 16~17 위안이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생각하는 흰네발나비의 가치였다. 하지만 다른 가치도 있지 않을까? 자전차 뒷자리에서 아버지 허리를 끌어안고 땀 냄새를 맡으며, 노곤한 몸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는 그런 가치 말이다.

『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줄거리 : 1992년 타이베이의 가장 큰 상가가 허물어지던 날, ‘청’의 아버지가 자전거와 함께 사라진다. 어린 시절 경험한 거대한 상실을 가슴에 묻어둔 채 어른이 된 ‘청’은 고물 수집가 ‘아부’를 통해 사라진 자전거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되고, 자전거가 거쳐온 여정을 거슬러 가보기로 한다. 뜻밖에도 자전거의 궤적은 현대 대만에서 출발해 말레이반도, 북미얀마의 밀림 등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이어진다.

🗂️대만 현대화 과정, 식민 시대의 역사, 전쟁에 휘말린 인간과 동식물의 일생이 켜켜이 얽힌 작품.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버마의 밀림, 대만의 숲을 묘사한 장면들이 너무 섬세하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전쟁의 또 다른 모습들. 민족이자 가족,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 자전거로 대표되는 시대상. 거듭 나오는 빛과 물에 잠겨드는 듯한 기분. 하지만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오롯이 그 속으로 빠져있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것을 “사실과 허구, 환상이 유기적으로 직조된 이야기를 읽으며 현실의 장대함이 여느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을 능가할 수 있음을 알았다”는 역자의 말로 대신하고 싶다.

🗂️처음 읽을 때부터 대학생 때 본 영화 자전거 도둑을 떠올렸다.(실제로 책에서도 언급됨) 책도 영화도 다시 보고 싶다.

📖밀림은 이처럼 찬란하고 죽음도 이처럼 찬란하다. 압바스는 나뭇가지로 다가가 오만한 금빛 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리마오는 십 초쯤 멈춰 있었다. 아니, 아마 일 초 만에 다시 앞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그것은 앞발 뒷발을 차례로 내디뎌 소리 없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강렬한 냄새만을 남긴 채. 하지만 압바스의 뜨겁고 급한 심장 박동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평온을 되찾았다. 자기도 모르게 왈각 눈물이 쏟아졌다. 이 숲속에서 그는 들어갈 것인지 떠날 것인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숲은 한 시대와 같았다.

📖형의 옆모습을 보았다. 세월이 한 겹씩 내려앉을수록 형의 얼굴이 내가 태어날 무렵의 사진 속 아버지와 점점 닮아가고 있었 다. 말하는 속도도 비슷해졌다. 문득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릴 낳고 무진 고생을 다해 공부시켰지만, 결국 우리는 아버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 되어 영영 그들 곁을 떠나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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