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파리 박물관 기행 (워크북 포함)
심지영.박재연 지음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1월
19,400원 → 19,4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5년 12월 01일에 저장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루브르 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손 안의 미술관 1
김영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0여 페이지에 수많은 작품들을 다루다 보니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서 내용에 깊이가 전혀 없다.
그건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턱도 없는 엉터리 정보가 여기저기 섞여 있다는 점이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쓰는 책을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하고 성의없게 쓸 수 있는지 참 용기가 대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재까지 알라딘에서 총 541권에 대략 585만 원어치를 구매했군. 내가 미쳐. 상위 0.34퍼센트라는데, 적립금이라던가, 뭔가 특별 서비스 좀 더 해주면 안 되나... 이러나 저러나 나는 계속 팔아주겠지. 알라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부터 밑지는 장사

엄마에게는 원죄 의식이 있고, 

그래서 엄마가 된 여자들은 평생 가슴에 죄책감 한 덩이씩 얹어놓고 살아야 할 운명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완벽한 엄마'는 없고, 잘해야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뿐인데, 아이의 결점, 또는 아픈 구석이 보일 때마다 완벽하지 못했던 엄마 자신의 잘못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좋은 점은 아이가 원래 잘하는 점이다. 안 좋은 점은 양육의 실패다.

처음부터 밑지는 장사고, 지는 게임이다. 


엄마 노릇이 나만 이렇게 힘든가, 생각하다가, 아들들이 세 살 때,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보았다. 에바, 틸다 스윈튼에게 뭔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웬걸. 끝까지 못 보고 꺼버렸다. 영화는 엄마의 고충을 해명해 주지 않고, 되레, 그래도 다 잘 될 거라는 희미한 낙관마저 가차없이 무너뜨렸다. 


얼마 전에, 다시 책으로 <케빈에 대하여>를 손에 들었다. 분량도 긴 그 소설을 읽어보면 영화에서얻지 못한 위로를 새로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원했던 위로가 뭔지는 확실치 않다. 

너만 완벽하지 못한 건 아니야, 인지, 네가 최악은 아니야, 인지, 거봐, 엄마 책임이 아니야, 인지...

어쨌거나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위로는 없었다. 책 역시, 아무 것도 해명해 주지 않았고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먹먹한 가슴으로 다 읽고 나서 얼마 뒤, 그러니까 최근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 나왔다. 

미국의 학교 총격 사건의 원조 격인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사건의 가해자의 엄마가 쓴 수기였다. 궁금증이 밀려왔다.

소설적 상상력과 실화는 어떻게 다를까.

<케빈...>과 <가해자...>를 모두 읽고 나서야, 지금 돌이켜 보건대, 어떤 위로가 나를 찾아온 듯싶다. 하지만 이 위로는 엄마로서의 내 책임

나는 안전하다는 허망한 낙관을 주는 위로도 아니다. 내게 찾아온 위로.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지금 나는 이 글을 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 대하여

<가해자>를 읽으면서 <케빈>의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콜럼바인 사건을 자세히 조사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2010년에 책을 낸 슈라이버가, 2016년에 나온 <가해자>를 읽고 쓴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두 이야기는 겹치면서도 미묘하게 딴판이다. 완전히 딴판이면서도 미묘하게 겹친다.


<케빈...>의 케빈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아들 딜런 클리볼드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족에서 자라났다.

케빈과 달리 딜런은 자라면서 한 번도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을 정도로 착한 아들이었고, 양식 있는 부모, 엄마 수와 아빠 톰의 사랑스러운 둘째 아들이었다. 엄마와도 가깝고, 아빠와는 장시간 취미 생활을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 

케빈의 엄마, 에바 캇차두리안과는 달리, 수 클리볼드는 "처음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던 모성애 가득한 엄마다. 

또 "평생 장애인을 가르치고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을 해왔"던 도덕적인 시민이기도 하다. 수와 톰은 강압적인 부모도 아니었고, 아이들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부모도 아니었고, 위선 가득한 속물적인 중산층도 아니었다. 늘 아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신뢰하는 부모였고, 인간에 대해 진솔한 애정과 정성을 쏟는 이웃이었다.딜런이 학교로 무기를 가져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쏴죽인 사건 이후로 수는 여러 겹의 고통에 휩싸인다.

현장에서 자살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해야 했고,

아들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 무고한 생명을 무작위로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고,

사건 이후 속속 드러나는, 자기가 몰랐던, 자기에게 철저히 은폐됐던 아들을 발견하는 비극을 견뎌야 했다. 


수와 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딜런은 자살 성향 우울증을 몇 년간 앓고 있었음이 사건 이후에 추정되었다. 

콜럼바인 사건의 공범이자 딜런과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에릭은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추정되었다.

한 연구자는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딜런이 자기가 죽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면,

에릭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자기가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고.


딜런은 절박하게 죽고 싶었지만 '자살로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에릭의 카리스마 넘치는 파괴 충동에 의존해야 했고, 

에릭은 자신의 기상천외한 살상 계획을 함께 실현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이들은 사제폭탄을 만들어 학교 식당에 설치했는데 다행히도 터지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십여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들이 어떻게 그런 살상 괴물이 될 수 있었을까.

사건 이후, 당연히 수와 톰은 피해자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살해 위협을 당하고 온갖 비난을 뒤집어 쓴다.

비난의 핵심은 그거다.

"엄마가 어떻게 키웠길래..." 그리고, "자식이 그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부모가 모를 수 있어..."

이 책에서 저자 수 클리볼드는, "나는 내가 딜런을 살인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단호하게 밝힌다.

아들이 보인 광기의 원인이 엄마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수 클리볼드는 사건 이후 16년 동안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싸워왔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절실하게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수가 주목하는 사실은 딜런이 "자살 성향"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는 점이다. 죽고자 하는 욕망과 우울증이 정상적인 사고 체계를 무너뜨린 결과, 그런 비인간적인 살상극을 벌일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는 이렇게 말한다. 

수는 이렇게 말한다. 

"딜런에게는 자살로 죽겠다는 욕망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수가 딜런의 학살을 엄마의 책임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이유는 그것을 일부 몰지각한 부모 밑에서 괴물로 자란 일부 아이들의 일탈로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고, 정신 건강의 위협을 받는 현대인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 사회 문제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살 연구자들은 자녀의 정신 건강 문제를 부모가 모를 수 있다고, 감추고자 하면 까맣게 모를 수 있다고 말한다. 수가 특별히 무뎌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부모가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얘기다.


수는 사건 이후 16년 동안 미국 '자살방지재단'에서 일하며 적극적으로 "콜럼바인 사건 가해자 엄마"로 살아간다.

떨칠 수 있다면 떨치면 좋을 "가해자 엄마" 주홍글씨를 가슴에 매단 채,

잊을 수 있다면 잊으면 좋을 그 사건을 매일매일 되새기며, 

잠재적 피해자들을 최대한 줄이는 일에 헌신하고자 한다. 

괴물 엄마가 괴물 아들을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엄마 아래서도 적절한 개입과 도움의 시기를 놓친다면 아들은 얼마든지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도 하고, 

"남들에게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괴물이지만 자신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던 아들 딜런을 기억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나가고 적극적인 예방과 교육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조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래서 소아 우울증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과 접근 방식에 대한 폭넓은 정보가 담겨 있다.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오늘도 만성 불안에 떨고 있을 많은 부모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수 클리볼드라는 한 인간이 감히 상상하기 힘든 고난에 처한 뒤 그것을 건강하게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퍽 감동적이다. 경이롭다.


<케빈에 대하여>에 대하여

이제 <케빈...>을 얘기해 보자.

케빈의 엄마이자 이 소설의 화자, 에바 캇차두리안은 수 클리볼드와는 다르다.

클리볼드는 "처음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말할 만큼 엄마의 역할 자체를 사랑했지만,

캇차두리안은 임신 자체를 꺼려 했다. 워낙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다니는 히피 스타일의 자유혼이었던  에바는 임신과 함께 찾아온 삶의 구속을 숨막히게 힘들어 했다. 공교롭게도 남편은 착하긴 해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전형적으로 보수적인 남자다.

에바의 심리적 위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마음도 없다. 

남편은 아이를 무척 낳고 싶어했고, 결국 에바가 임신을 결심해 주어 마냥 좋다.

임신과 함께 아내 에바는 아이를 낳아줄 '모체'에 다름 아니고,

출산과 함께 아내 에바는 아이를 올바로 양육해야 할 '어미'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아들, 케빈 중심으로만 돌아간다.

케빈이 무슨 짓을 해도 남편은 그 이면의 심리적 역동을 보려 하지 않고,

아니, 표면에 버젓이 들어나 있는 이상 징후마저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썩 원하지 않던 아이를 낳게 된 뒤로 남편과도 소원해진 에바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 케빈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젖을 거부하고 고문에 가깝게 울어대기만 한다.

에바는 그런 케빈을 달래지 못한다.

에바와 케빈은 그렇게 처음부터 평행선처럼, 마주서 있지만 끝내 만나지 못할 관계를 질주한다.

<케빈...>에서 케빈은 딜런처럼 학살 현장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아 투옥된다.

교활하게도 성인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열일곱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소년범으로서 고작 7년을 선고받는다. 열 몇 명을 죽였는데도.

그리고 케빈은 학교로 석궁을 가지고 찾아가 친구들을 죽이기 전에, 집에서 아빠와 여동생을 먼저 죽인다.

소설은 에바가 죽은 남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서술된다.

정기적으로 아들 케빈의 면회를 다니면서 남편 프랭클린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를 통해 에바는 붕괴되지 않고 버틴다.

그것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끝끝내 아들의 비행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자기가 상상하는 '쿨한 부자 관계'를 마치 현실인 양 믿고 싶어했던 어리석은 남편, 

프랭클린에게 편지를 쓰면서 에바는 그간의 사건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다.


객관적으로 보면 에바는 수 클리볼드보다 더한 고난에 처했다.

아들이 학교 친구들과 교사만 죽인 게 아니라, 남편과 그토록 사랑했던 딸마저 죽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로서 에바에게는 그다지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반.성.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바의 진술 속에 자책은 별로 없다.

수 클리볼드처럼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이 빼앗은 목숨들에 대한 애도도 절절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여전히 냉정하고 차갑다.

여전히 불합리한 미국 사회를 냉소할 뿐이고,

케빈의 타고난 괴물 본성만, 남편에게 사실 관계를 바로잡듯 세세히 설명한다. 

피해자 부모에 대해서까지 냉소한다.

에바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는 더 큰 이유는,

프랭클린이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위선으로 케빈의 비행에 눈을 감았다면, 

에바는 문제의 심각성을 번히 보면서도 안일하게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케빈이 여동생에게 화장실 세척제를 부어 한쪽 눈을 멀게 했을 때조차도.

반성할 줄 모르고 자식의 문제를 수수방관한 엄마는 동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

에바는 밉다.

이 책이 불편한 이유고, 이 책이 범상치 않은 이유다.

 

저자,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콜럼바인 참사가 제기하는 문제를 한 번 더 뒤집어서 아예 대답할 엄두를 못내게 만든다.

엄마가 다감하고 따뜻하지 않았으면 그녀를 비난해야 해?

엄마가 자식의 잘못을 눈물로 사죄하지 않으면 그녀를 비난해야 해?

애초에 애착에 실패한 엄마는 아들의 광기를 책임져야 해?

세계를 누비며 자유롭게 살던 여자, 자기 사업에 열정적이던 여자가 하필 육아에 전병이었으면 아들의 광기를 책임져야 해?

사실 이 질문은 수 클리볼드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실제로 가해자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책 <가해자...>를 이런 태도로 접근했다면 아마 벌써 사회적으로 생매장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제로 <가해자>에는 수가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을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는 부분이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수의 진심이겠지만, 동시에 까딱 잘못 표현됐다가는 큰 화를 부를 수 있기에 바짝 긴장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수기로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가해자 엄마"의 내면을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소설로 적나라하게 그려낸 셈이다.  




<케빈...>과 <가해자...>는 둘 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퍼즐 조각 맞추듯 정확히 꿰려 애쓰지 않는다.

케빈이 이래서 그랬고 딜런이 이래서 그랬고, 이건 누구 책임이고 이건 누구 책임이고, 그렇게 정확히 구획해 따지지 않는다.

원래 삶은 그렇게 물건 사고 잔돈 거슬러 받듯 정확하게 치러지는 계산이 아니니까.

커다란 질문이니까.

폭력의 현존 앞에서 "왜"라는 질문이 무력해지고 "어떻게"의 방향만을 모색할 수 있는 종류의, 제한적 질문.


나에게는 내 삶도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고, 내가 키우는 아이들도 내게 커다란 질문이다.

내 과거를 뒤적여 지금 내가 나인 원인을 특정할 수 없듯이, 내가 키우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기질, 행동에 대해 하나의 원인을 특정할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키우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꾸준히 '어떻게'라는 질문을 붙들고 그날그날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다고 해서 폭력의 현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나 우리를 파국으로 몰고 갈지 모른다.

내 기도는 파국 속에서도 여전히 그날그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어렴풋이 얻은 위로는 

사람들에게 동정받고 싶은, 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는다면

엄마로서의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이 조금 가벼워질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그날그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수 있을 뿐이다. 

더 외로워지는 용기를 위하여.

"아무리 끔찍한 일을 저질렀더라도, 딜런은 언제까지나 내 아이다"라고 고백하는 수 클리볼드처럼,

케빈의 출소를 기다리며 집에 케빈의 방을 마련하는 에바 캇차두리안처럼,

어찌됐든 사랑 안에서 허물어지기.

사랑 안에서 허물 벗기.

그러므로 엄마는 "처음부터 밑지는 장사"가 아닐지 모르고,

인생은 내가 이따금 생각하는 것처럼 저열한 어떤 것이 아닐지 모른다.

결국 사랑이라면.

결국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과 화해하는 사랑이라면.





참고로,

수 클리볼드는 사건 직후에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 떠올린다.

아들 딜런을 낳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다음 날, 딜런을 안고 있는 동안 한 순간 "마치 머리 위로 맹금이 지나가며 우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만" 같은 강한 예감에 압도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나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줄 거야."

너무 놀라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2주 뒤에 아기 딜런이 즉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심각한 병이 발견되어서 수술을 하게 되는데,

그때 불길한 예감의 실체가 그 병이었나 보라고, 이제 위기를 넘겼으니 불길한 예감도 없다고 안도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나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줄거야.

그 예감은 무엇이었을까.

17년 뒤의 비극을 예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2016.09. 14. a.m. 05: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 - 거대한 그린란드상어를 잡기 위해 1년간 북대서양을 표류한 두 남자 이야기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 저자가 쓴 이 책,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은 섬세하고 꼼꼼하게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이다.

완성도 높은 그림은 그림의 일부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충분히 섬세하고 아름답듯이, 

이 책도 한 장면, 장면, 한 문장, 문장이 아름답다.

하지만 그 진가는 역시 전체를 조망했을 때 제일 잘 드러난다.

 

“현재 북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자 모험가, 역사학자, 사진작가, 저널리스트”라고 책에 소개돼 있는 저자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와, 본래 예술가이면서 “바다가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의 친구 후고는 어느날 고무보트를 타고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에서 그린란드 상어를 잡기로 의기투합한다. 

이름하여 그린란드상어 잡기 프로젝트.

 

그린란드상어?

공교롭게도 지난 8월12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그린란드 상어가 척추 동물 가운데 최장수 동물로, 최소 400년 이상 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우리나라 언론들은 (그린란드상어가) “임진왜란 때부터 살았어요”, “신사임당과 동갑이에요”와 같이 재치 있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2016년 8월12일 <사이언스>에 이 흥미로운 논문이 실리기 전에 책을 쓴 저자는 안타깝게도

“최대 200년까지 살 수 있다”는 당시의 유력한 이론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가 잡으려는 그린란드 상어가 나폴레옹 전투 때 태어났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럼 왜, 이 두 사람은 살아 있는 유물과 다름없는 그린란드상어를, 

그러니까, “수억 년의 진화를 거치고, 어쩌면 피에 맹독이 흐르고, 눈과 거대한 톱니 같은 이빨에 기생충들이 우글거리는 게걸스러운 괴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네 손으로 꼭 잡겠다고 벼르는 걸까.

 

저자의 파트너, 후고는 그린란드 상어가 서식하는 베스트피오르 해안에서 나고 자랐고, 

독일의 유명 예술 대학에서 잠시 유학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바닷가에서 살았다.

후고가 독일에서 배워온 것은 그림 외에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보적 견해”. 

정치적 진보가 아니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진보다.

저자가 “후고는 대체 몇 퍼센트까지 바다 포유동물일까” 궁금해할 정도로, 후고는 바다를 사랑한다.

아니, 그냥 바다 포유동물, 바다 생물이다.

또 후고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냉동 생선너겟을 먹지 않았고, 

대신 직접 마련한 신선한 야채수프, 수제 사슴 소시지를 먹는다.

겨울 대구를 직접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조시켜서, 그러니까 “햇빛에 너무 많이 노출되지 않게 하고, 무엇보다 비를 피하기 위해 생선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다시 내놓기를 반복”해서 먹는다.

후고와 저자가 1년째 그린란드 상어를 잡지 못하고 허탕만 치다가 배까지 고장이 나 수리를 맡겨 놓고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과 갈등 기류가 생겼을 때, 저자는 후고에게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왜 그렇게 그린란드상어를 잡으려는 거야?"

 

후고가 답한다. 

 

“적어도 30년 전부터 나는 그린란드상어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잡고 싶었어.”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야. 누군가에게 얘기하거나 읽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 며칠씩 그린란드상어가 미끼를 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오던 때를 묘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쓴다.

 

“지금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무의미한 것 중에서 우리의 상어 프로젝트를 능가할 만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저자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는 “현재 북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답게 글 솜씨가 신묘하다.

재치 있고 기발해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답게 역사와 신화, 해양지식까지 두루 꿰면서도 딱히 가르치려 들거나 장황하게 지식을 뽐내지 않는다.

그저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때그때 짧은 단상과 함께 적절한 신화나 일화, 바다 이야기를, 딱히 독자에게 건넨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듯 풀어낸다.

어찌보면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이 무의미하다.

당연하다.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을 소개하는 책인데, 이미 상어 프로젝트가 “모든 무의미한 것 중에서” 가장 무의미한 듯 보인다고 고백한 마당에, 그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이야기들이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왜 무의미한 이야기들을, 별 맥락도 없이, 들쭉날쭉한 조각보처럼 이어붙이는 것일까.

 

“후고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을 좋아한다. 한 이야기가 서서히 힘을 잃을 때 다음 이야기에 바통을 넘겨, 이야기가 계주처럼 계속 이어져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고 후고의 화법을 소개하지만,

저자의 서술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심해의 희귀 생물과 해양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향유고래와 범고래, 포경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비딕, 로빈슨 크루소,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구의 생성과 진화에 대해,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쇠사슬이 박힌 트롤망으로 바다 밑바닥을 훑어 "생물이 우글거"리는 산호초 숲을, 즉 복원되려면 수 천년이 걸릴 "치어들의 보금자리"를 순식간에 파괴하는 트롤어선이나, 산호초 해역 인근에서 석유 시추 작업 허가를 받은 정유회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매년 바닷새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백만 마리 이상씩 목숨을 잃고 바다포유동물 수십만 마리가 죽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19세기에 시작된 바다의 산성화로,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플랑크톤이 사라져가는 긴박한 위기, 

즉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멸종될 인간의 운명을 저자는 이렇게 날카롭게 묘사한다.


"플랑크톤이 죽으면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우리는 결국 배에 잡혀 올라와 가쁘게 헐떡이는 물고기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저자가 바다 생태계 오염의 심각성과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책의 후반부, 네다섯 페이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네 다섯 페이지는 결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토록 아름다운 피오르 해안을 묘사하고, '바다 포유동물' 후고 집안의 내력에 대해 소개하고, 지구의 역사를 들먹이고, 아직까지 우주의 신비만큼도 드러나지 않은 심해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니, 이 무의미한 '상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메시지가 강렬하다. 

저자는 노련하다. 

아무 것도 자기 입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이야기하게 만든다.

이 책은 모든 걸 다 떠나서 문학 작품으로서만도 퍽 매혹적이라는 얘기다. 


이야기의 조각보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상어 프로젝트를 애초에 제안한 것은 후고였고,

저널리스트로서 아프리카 콩고의 실상을 직접 경험하고 취재해 집필한 <콩고에서의 살인>을 출간한 바 있는 저자는 

바다를 사랑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트로서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은 후고고, 저자는 기록 전달자에 가깝다.

후고는 어릴 때 그의 아버지가 했던 방식대로, 즉 맨손으로 맞짱을 뜨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그린란드 상어를 잡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린란드상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북유럽 어디나 먹을 것이 부족하여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되었음에도 그린란드 상어 고기는 남아돌았"을 정도로, 살에 독이 있고 오줌 냄새가 나서 식용으로 쓸 수 없을 뿐더러 잡아봤자 별다른 가치가 없다. 

상어프로젝트 자체가 무의미해 빠진 짓거리인 셈이다. 

하지만 후고가 하는 일 중에 썩 의미 있는 일은 많지 않은 듯하다.

도축될 위기에 처한 어린 양이 불쌍해 집으로 데려왔다가, 또 그 양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친구 양을 한 마리 구해줬다가, 

양 커플이 통제가 안 될 정도로 투실투실하고 강하게 자라자 근처 무인도 섬에 풀어준 뒤 수시로 들러서 안부를 확인한다든가(나중에는 사정이 생겨 도축을 하지만),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던 생선 가공 공장, 오스요르브루켓을 인수해 몇 년에 걸쳐 손수 수리한다든가,

또 먹을거리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느리고 번거롭게 마련해 먹는다든가.

이쯤에서, 저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은, 후고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보적 견해”가 얼추 이해된다.

돈 안 되는 일(무의미)을,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전통적이고 느린)으로 한다. 왜? 

"나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야." 

"누군가에게 얘기하거나 읽히려고"도 아니고, 비장하게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저자와 후고는 끝내, 그린란드상어를 잡지 못한다.

거의 잡았다, 가 놓친다.

바로 눈 앞에서.

잡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했지만, 잡은 이후를 전혀 대비해 두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들의 무의미해 빠진 일은 그렇게 완성된다.

철저히 무의미하게.

목숨 걸고 무의미하게. 

다들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진실은 삶이란 원래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목숨 걸고 무의미하게"는 목숨 걸고 삶을 진솔하게 직면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무의미한 (돈 안 되는) 일을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려면 목숨 걸고 해야 하니까.

저자는 후고를 "바다 포유동물"로 간주한다. 

바다 포유동물은 순전히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만도 매 년 수십만 마리씩 죽어나간다. 

그러니 후고는 멸종 위기 동물이다. 

저자는 인류의 재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기후변화로 재난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몇백만 년 뒤에 바다 생물은 원기를 회복하여 생산적인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몇백만 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원기를 회복하여 생산적인 균형을 다시" 찾는 것은 후고들일 것이다. 

무의미한 삶을,

대량으로 싹쓸이하는 방식이 아니라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기 욕심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목적을 위해 꾸려나가는 이들.

물론 몇 백만 년의 시간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참, 이 저자의 글솜씨가 탁월하다고는 본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재치 있고 기발해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기는.

웃음 끝에 눈물이 배일 것 같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내가 읽은 노르웨이 저자들 글투가 다 좀 그랬다.

<나의 투쟁>의 칼 오베크나우스고르도,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의 스콤스볼도.


그나저나, 출판사의 의뢰로 리뷰를 쓰기로 한 건데, 

이거 느무느무 성실하게 쓴 거 아닌가 모르겠다.

좋다. 무의미하게. 돈 안 되는 일. 비효율적으로.



2016. 09.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