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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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9호실로 가다>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19호실로 가다》열한 편의 단편 중 맨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이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현재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읽는 동안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도 떠올랐다. 레싱은 가부장제와 해체된 성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정체성과 삶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수전과 남편 매슈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완벽한 커플이었다. 뛰어난 외모에 경제적 능력을 지녔고, 자기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각자의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결혼 후 ‘인기 있는 젊은 부부’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 수전은 아이를 가지면서 자기 일을 그만두고 집안에 들어앉았다. 남편이 밖에서 자기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동안 수전은 집안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영혼을 탈탈 털렸다. ‘생계와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모두 남편에게만 의존’하게 되면서 ‘분노와 박탈감’을 느꼈다.

 

세월이 흐르면서 뜨거웠던 사랑의 유효기간이 만료되고, 남편 매슈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 시절 지성인은 바람피운 얘기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던 걸까. 매슈는 젊은 여자와 자고 온 이야기를 친구만나고 온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수전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남편의 ‘부정’에 항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룻밤의 젊은 아가씨가 그들이 가꿔온 십년의 견고한 사랑과 결혼생활을 흔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그 젊은 아가씨가 이미 남편에게 자신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매슈의 계속되는 외도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 ‘부정’이나 ‘용서’라는 말을 거론하는 건 진부한 일로 취급되었다. 고상한 지성이 ‘싸움, 삐치기, 분노, 속으로 침잠한 침묵, 비난, 눈물’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지성에 발목이 잡힌 수전은 남편의 외도로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자기감정과 맞서는 대신 바느질이나 아이들 돌봄에 몰두했다. 지성을 갖춘 부부, 네 아이들, 커다란 집, 좋은 차, 파출부, 입주가정부까지… 완벽해 보이는 가정을 지탱해가는 동안 수전의 삶은 공허해지고, 영혼은 피폐해진다.

 

가부장제 사회체제 속에선 부부가 둘 다 경제활동 능력이 있을 때 자기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당연히 여자의 몫이 되었다. 결혼 초 평등했던 두 사람 관계가 종속관계로 변하는 것도 이 때부터다. 한 사람이 경제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부부 사이엔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돈을 벌고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에겐 또 하나의 특권이 부여된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쯤은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일로 치부된다. 남편 바람쯤으로 가정을 깨뜨리면 안 된다는 생각,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엄마가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은 이 소설 속 롤링스 부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수전이 매슈의 외도를 이해한 척, 용서한 척 하는 것도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일 것이다. 만약 수전이 자기 일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면 분명 다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은 것처럼 분한 마음을 느끼며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지도, ‘초조함’과 ‘공허함’으로 불안해 하다가 혼자만의 방을 찾아 헤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 삶을 유보하게 했던 사랑이 없는 집, 존재 의미와 영혼이 사라진 집에서 수전은 점점 고립되어 간다. 수전은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다니다 허름한 호텔을 발견한다. 패팅턴의 프레드 호텔 19호실은 그녀가 일 년 가까이 혼자서 낮 시간을 보낸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상처받은 영혼은 있는 힘을 다해 살아야할 이유와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는 자신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자, 누구에게도 의미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죽음을 선택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작가 레싱은 1960년대가 “성적인 관습의 코미디 같은 시기”였고, “예의 바른 행동인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규칙 같은 것도 없던” 시대였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서 수전이 죽음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인간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가치, 예의가 무너진 것에 대한 경악이었다. 레싱은 <19호실로 가다>에서 수전과 매슈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일그러진 사회질서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울러 가부장적 사회체계 속에서 여성의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미모, 지성을 갖춘 여성일지라도 자기 삶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 속 수전의 삶을 따라가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생계를 꾸려갈 수 있어야 함은 물론, 자신을 살게 하는 강열한 “그 무엇”이 꼭 있어야 함도 알았다. 수전에게 “그 무엇”이 있었다면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성중심으로 흘러가는 기울어진 사회체계를 변화시켜가는 데도 일조하며 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돈을 벌던 여자가 생계와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모두 남편에게만 의존하게 되었을 때 남몰래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282쪽-

"처음에 나는 어른이 된 뒤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인생을 살았어. 그리고 결혼했지. 처음 임신한 순간부터 나는, 말하자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어. 아이들에게. 그 후 12년 동안 나는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그뿐이야." -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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