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4
이부세 마스지 지음, 김춘일 옮김 / 소화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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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검은비는 출판된 이래 2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이 되어, 지금까지 이부세의 대표작으로, 또한 일본 원폭문학의 대표작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이제까지의 원폭문학이 히로시마 작가중심으로 개인의 원폭경험을 처절한 고통과 분노의 외침으로 점철되었다면, 이부세의 검은비는 원폭의 희생자로 사라져간 수많은 이름없는 이들과 아직도 그 고통속에서 살아가고있는 익명의 사람들의 삶을 조용한 목소리로 깊이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부세는 이 작품 속에서 고통의 절규보다는 무명의 희생자들의 소중한 삶과 처절한 마지막 순간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원폭이 점점 정치화 되어가면서 화석화 되어가는 원폭의 실상들을 이부세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시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5명이 써가는 7개의 일기형식로 구성 되어있으며, 작가는 이 일기들을 원폭피해자 야스코의 결혼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가고 있다. 이야기는 45년 당시와 십여년이 지난 현재를(5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왕복해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으며, 지금의 삶에 미치는 피할수 없는 영향을 그려내고 있다.

검은 비가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이부세가 이야기하는 절망속의 포기하지않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며 읽어본다면, 이부세가 파괴와 죽음을 생명의 징조와 함께, 같은 비율로, 강조로 서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이 작품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부세의 유우머이다. 이부세는 그의 특유의 조용하면서 거의 건조한 유우머를 통해, 체제의 모순과 허상, 전쟁과 원폭의 비인간적인, 이해불가능한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부세는 히로시마 근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원폭당시 자신의 마을로 피난해오는 원폭희생자들을 목격했다. 1950년대에 카키츠바타 라는 단편작품으로 원폭문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으나, 20년이라는 세월을 둔 다음에야 본격적인 원폭작품을 내놓았다. 20년이란 시간은 이부세가 필요로 했던 예술적 거리감이었을 것이며, 원폭의 목격자로서 원폭을 얘기하는 자의 겸손함과 조심성일 것이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발표와 더불어 검은비는 원폭문학의 대표작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으며,특히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정치성이 짙은 기존의 원폭문학을 비판하며 이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원폭문학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매해 8월이 되면 의례적으로 이부세에게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며 이부세는 마치 원폭문학의 거물로, 반원폭의 인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는 이부세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며, 시대의 모순을 그리되 정치성은 배제해온 그로서는 원하지않는 옥좌였던 것이다. 이부세는 심지어 검은비를 쓴 것을 후회한다고 까지 말을 했으며, 이 작품이 기존의 원폭문학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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