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접하면서 감정의 어떤 주파수는 진폭이 줄어들고 어떤 주파수는 증폭되는 구조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연습이 부족해서 생긴 빈틈은 그 원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것으로 메꿀 수 있다는 것.
동시에 나는 대학을 싫어한다. 오늘날 대학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이란 어리둥절한 채 성인이 되어버렸으나 실상은 유예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귀중한 스무 살 생명표를 꼭 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태어난 국민 중 팔 할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넌 잘하고 있다고, 너만의 특질과 큰 가능성이 있다고, 네가 발을 떼기만 하면 앞뒤가 아니라 사방, 아니 만방으로 길은 열릴 것이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가. 스무 살, 스물한 살은 그런 이야기를 차고 넘치게 들어도 되는 나이다.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