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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우울한 사랑 - 밀란 쿤데라 대표 단편선
밀란 쿤데라 지음, 박민아 옮김 / 거송미디어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밀란 쿤데라의 글들은 '우발성'을 뚫고 지나간다. 우연히 길을 걷다 청년시절 섹스를 나눴던 여자를 만나고, 길에서 만난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고, 자기가 혐오한 대상과 섹스를 한다. (각각 다른 에피소드) 하지만 "인생은 다 그런거지"라는 말로 정리하기엔 밀란 쿤데라의 글은 가볍지가 않다.
<가볍고 우울한 사랑>의 몇몇 에피소드들은 연인관계의 정리로 결말을 내린다. 내가 읽으면서 꽂혔던 에피소드는 <가볍고 우울한 사랑>이라는 단편이었다. 연인과 여행을 떠나다 이 두 연인은 갑자기 히치하이킹으로 처음 만난 남과 여라는 컨셉으로 '롤플레잉'을 시작한다. 수줍던 여자는 어느 샌가 밀당을 즐기는 새침스런 여자가 된다. 남자는 자신의 스킨십을 거부하는 여자로부터 불쾌함을 표현한다. 여자도 남자의 불쾌한 기분을 포착하지만 그들은 이 '롤플레잉'을 멈출수 없다. 욕망의 거부 그리고 의도치 않은 상처는 계속해서 이 롤플레잉을 지속시킨다. 그리고 그 상처의 깊이는 욕망의 굴절만큼 커진다.
이 후 남자는 자신의 연인을 마치 매춘부 대하듯이 다룬다. 여자가 다른 남자들 앞에서 모욕을 당할때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피아노 위에서 여자가 나체의 상태에서 춤을 춰도, 그리고 섹스를 할때도 그는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키스는 사랑하는 여인에게만 하는 것"이라며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할 것을 거부한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나는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하지만 그는 등을 돌려버린다.
<가볍고 우울한 사랑>의 몇몇 단편들은 우발적으로 감정의 심판을 받는 여러 사랑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선택지는 단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깊은 생각을 통해 드러나지도 않는다. 단지, 그들은 왠지 그 순간엔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이들이 견고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이 위장과 상처에 대한 적개심으로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 버린다. 자신이 바라던 욕망을 채웠음에도 만족하지 않는 감정의 나열들은 일순간에 모든 관계를 해체해버린다. 밀란 쿤데라는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보편적인 사랑의 숭고미를 우발적 요소로 흔들어 버린다. 그의 글에서 시간이 교차하고 상대방을 속이는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만의 코드이다. 진실한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본질을 품고 있어서 껍데기 안의 알맹이는 우리는 포착할 수 있다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명제에 냉소적 웃음을 던지는 코드 말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정황에 의해 주어지는 욕망의 마주침. 그렇기 때문에 밀란 쿤데라에게 사랑은 본래 가볍고 우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