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십팔사략 - 전10권
고우영 지음 / 두산동아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1979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였다. 어느 날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고우영 선생의 삼국지를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난 고선생의 열렬한 팬이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고3생의 스트레스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난 고 선생의 삼국지 시리즈를 몇번식이나 되풀이 해 읽으며 힘든 고3시절의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 후 딴지일보에서 CD판으로 출간한 삼국지를 다시 읽으며 그 시절을 돌이켜 보기도 했고 어렵사리 초한지를 구해다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책들에 비하면 이 책은 독자에 대한 사기에 다름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후회가 밀려온다. 고선생께서 건강에 문제가 있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은 팔아서는 아니될 책이다. 선생의 삼국지, 일지매, 서유기, 초한지, 열국지... 더 거슬러 가서는 최배달 선생의 이야기을 그린 만화와, 어느 소년지의 부록으로 나왔던 구월산유격대(중간에 다른 작가로 바뀌긴 했지만...)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책은 사기다. 선생의 붓끝이 아무리 어지러워 졌다한들, 선생의 시각이 아무리 무디어 졌다한들 이 정도일까 싶다. 난 이 책만큼은 고선생의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물론 전에도 선생의 필치를 흉내낸듯 한 부분이 끝부분의 몇페이지 정도나오는 경우는 있었다. 삼국지도 그랬고 초한지도 그랬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선생의 붓으로 그려졌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그림과 지문들이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주었지만 그래도 끝부분의 조금이었기에 읽어줄 수는 있었다. 소장은 정말이지 하기 싫었다.

이책, 열국지는 전체 열권가운데 고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단언하건데 한권도 없다. 일단 지문이 선생의 글씨가 아닌 활자로 찍혀있다. 그림도 정말이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사람,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다지 똑똑한 사람도 아니다. 이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는 말하는 용기도 못가졌다. 그러나 이말은 해야겠다. 이 책은 팔아서는 안될 책이다. 얼마전 모 방송에서 방영중인 골프프로그램에 고선생이 나오셨는데(역시 만화가인 이상무 선생과 함께...) 많이 회복된신 것 같아 무척 기뻐했던 적이 있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오늘의 내가 만들어지기까지 고 선생의 작품들이 영향을 끼친것은 사실이고, 그 영향은 분명히 긍정적인 쪽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걸 나는 안다. 그러나 고선생의 작품이 이 책과 같았다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란 것도 나는 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배우지도 못했고, 똑똑하지도 않고, 용기도 없다. 게다가 풍족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도박도 안하고 내기도 안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기로 했다. 이 책, 열국지가 고선생의 손으로 그려진 것임을 증명하는 독자가 있다면 쏘주 한 잔 사겠다. 쏘주마시면서 고선생의 쾌유를 빌겠다. 그리고 고선생의 명예로운 은퇴를 권하겠다. 이따위 책이 고선생의 양해하에 출판된 것이라면, 고 선생의 병환으로 인한 생활고가 어지간했던갑다 하면서 내가 산 이 책 열권에서 나온 인세가 도움이 되었길 빌터이다.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하면 난 잠을 설칠 정도로 좋다. 서점으로 뽀르르 달려가서 사오면 그만 아니냐 할 분 도 있겠지만 난 책이 택배되어 오기까지 그 기다림의 시간을 좋아하고 즐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 열국지도 많이 기다렸다. 평소보다 한 이틀 정도 더 걸린 것 같다. 그 조바심의 시간도 나는 기꺼워하며 즐겼다. 난 내가 사두는 책들이 내 아이들의 양식이 되어주길 기대하면서 책을 사는 사람이다. 맛난 음식 좋은 옷을 입히지 않아도 내 서가에 가득찬 책들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이책은 물려주지 말아야겠다. 책을 사고 후회하기는 정녕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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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6 1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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