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 낮의 이별과 밤의 사랑 혹은 그림이 숨겨둔 33개의 이야기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절망스러우면 절망스러운 대로
그 속에 철저히 침잠해 있으리라는 거였다.‥˝
_이정하

이게 선택의 문제인지
참고 견뎌야 하는 문제인지
모르겠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시간을 견디는 것.
뭔가를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우선 뭔가를 가져야 한다.
오늘 아침 예전에 책을 읽다가
필사하며 적어둔 글이 마음을 두드린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머지 않아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길지 않은 생의 마지막 사랑 우리가 영원히 서로를 갈망할수 없다는 것 사랑이 지속되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닥쳐올 미래가 내포할 고통이 적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닥쳐오는 거센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지도를 보고 길을 잡고 냉정한 태도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라고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질 수 없는 그러나 갖지 않으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열망이 나의 영혼을 흔들었다 그는 비로소 나를 바라 보았다 미안하다 그의 얼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은 나에게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줬으나 나는 그 세상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은 나의 몸과 영혼을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게 했으나 우리의 사랑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날개와 같은 것 그리고 불행하게도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나는 것이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떠나야 하는 것이며 그 이후에도 나의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을 그는 나를 떠났으나 그를 사랑하던 나는 사랑과 함께 죽지 않았다 나는 살아 남아 사랑을 위해 슬퍼하고 기뻐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사랑이 내게 행한 방식이므로 모든 것은 지나간다 다만 영원과 흡사했던 그 한 순간만이 하나의 풍경으로 남아 텅 빈 삶의 한쪽 벽에 조용히 걸려있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슬퍼있는 것은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어느 날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언젠가의 그 시간을 되돌아볼때 내가 그에게 후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아픔이고나 슬픔이거나 갈증이거나, 그러한 아름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밤들이 있었다 수많은 낮들이 있었다 기억해둘 만한 일들 기억에서 사라진 일들이 있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희미해진 기억들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으나 지울 수 없는 일들도 존재한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들이 있었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황금빛으로 다시 갈색으로 변해가는 들판의 풀들이 있었다 찾으려 했던 길들 기다리는 시간 가눌 수 없는 열정 속도를 늦추지 않는 세월 빛바랜 무정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진 마음들이 있었다

나는 지우면 지워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동시 내가 존재하는 세계를 그에게 확실하게 인지시키고 싶었다 아니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부를 원했다 그 전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내가 그런 생각에 갈팡질팡 매달려 있는동안 시간은 나를 대신하여 순교자처럼 죽어 갔다

당신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것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심장이 뛴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의 삶에 편입 되었다거나 누군가가 내 삶으로 편입 되었다는 것을 쉽게 수긍할 정도로 내가 순진하지 않은 덕분이다 덕분에 어떤 시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동시에 끝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나의 가엾은 심장에게 타이를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군가가 하지않는 이야기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면 누군가의 부재는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한 무수한 짐작들이 모두 진실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의 부재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 하게 만든다 그 간극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그 모든 ‘있음‘들 뒤에 모든 ‘없음‘들이 온다. 그러니까 그 ‘있음‘들에 대해 일일이 다정한 이름을 붙여줄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후회라거나, 슬픔이라거나, 사랑 같은 이름들...다만 그저 이렇게 이 하나의 문장으로 마침내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 한다 그가 여기 있었다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우고 완전히 한 사람에게 집중할 때 표정과 표정사이 단어와 단어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동작과 동작 사이의 템포와 리듬을 감지할때 그리하여 그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의도적인 어긋남으로 템포와 리듬을 흐트러뜨림으로써 그 사람을 그 흐트러뜨리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맥락 없고 엉뚱하면서도 핵심에 근접한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고 당황하는 사람의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평면으로 저장될 운명을 가진 기억이 어떤 질감과 색채를 얻어 입체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 기억에 손을 대면 거칠거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손가락을 베일 수도 있다

눈을 감으면 아득히 멀어지고 아득히 가까워진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진짜 삶이다 어떤이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