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근대화
앤소니 기든스 외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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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근대화 - 탈전통사회에서 산다는 것




  “그러므로 근대성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 실험적이다. 싫든 좋든 우리 모두는 거대한 실험에 붙들려 있는 셈인데, 이 실험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인간행위자 주체인 우리가 행한 실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제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통제 바깥에 놓여 있다. 우리가 고정된 변수를 조작해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실험실 실험 같은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그것을 좋아하건 말건 우리 각자가 참가해야만 하는 위험한 모험과 더 닮았다. (p.94)”

  『성찰적 근대화』의 저자 앤소니 기든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실험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위들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또한 우리는 과거에 선조들이 했던 일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정확히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들이 공장을 돌리고 축산업을 하면서 조금씩 환경을 파괴한 결과 우리는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지도 모르는 결과들에 불안해한다. 과거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핵은 우리에게 국가 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전쟁의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 저자는 현 시대를 탈전통사회라고 명명한다. 말 그대로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 때 전통의 의미는 한 사회 속에서 공유되는 집단적 기억을 의미한다. 개인은 집단적 기억을 체득함으로써 그 사회 내의 공통된 가치관, 행동지침 등을 내면화하게 된다.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를 전통사회라 한다면, 탈전통사회는 개인이 사회로부터 어떠한 집단적 기억도 공유받지 못하는 사회를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내에서 개인은 전통사회 내에서는 규범적으로 내면화된 특정한 지침을 가지고 행동하던 부분을 이제 모두 스스로 결정해야하게 되었다. 우리가 탈전통사회를 살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수긍이 되었다. 그리고 실험적이라는 단어로 규정되고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다. 언제 핵폭탄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가까운 미래에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자연재해가 우리를 덮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외부적인 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고립되어 있다. 대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그 누구도 학생의 앞길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물론 부모님이나, 선생님, 선배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조언도 학생에게 확신을 가지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고립되어 있다. 당장 내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확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결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온통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은 무엇이 가장 자신에게 최선인지를 고민하면서 인생 진로를 결정하도록 강요받는다. 대학생이 되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부터 매일매일을 고민하고 있던 나로서는 앤소니 기든스의 탈전통사회에 관한 논의를 읽으면서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통사회가 탈전통사회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해서 사회가 더 살기 나빠졌다거나, 가치적으로 하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분투하면서 살아와서 도달하게 된 어느 흐름의 한 지점에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의 어느 시점보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것을 옳은 잣대로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어떤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평소에 가져왔던 의문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극대화되었다. 나 개인이 살아가는 데도 이러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괴롭히는데,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은 불확실성의 시대 안에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믿으며, 어떤 것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전통은 정체성의 매체이다. 개인적이든 집합적이든 정체성은 당연히 의미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전통은 또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반복재현과 재해석의 항상적 과정을 전제로 한다. 정체성이란 시간을 넘어도 한결같음을 창조하는 것인데, 과거를 예상되는 미래와 결합시켜 내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서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것을 더 넓은 사회적 정체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존재론적 안전감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염려가 있기에 전통이 ‘신봉자’들로 하여금 강한 감정적 집착을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통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위협은 매우 자주, 결코 보편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아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위협으로 경험되곤 한다. (p. 124)”

  전통사회 내에서 구성원들은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 내에 전승되는 집합적 기억들, 그리고 전통의 수호자가 전달하는 공식적 진리가 그들의 가치를 형성하고 정체성 또한 형성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사회가 그를 틀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규정짓는 것이다. 즉, 정체성이 뚜렷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그것이 참이든 아니든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뚜렷한 정체성은 그 사람이 인생의 수많은 결정을 내릴 때 하나의 지침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확고한 지침으로서, 본질로서의 정체성은 개인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전통사회의 구성원들은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탈전통사회를 살고 있는 개인들은 정체성을 전통이 규정지어주지 않는다. 가족으로부터의, 마을공동체로부터의, 국가로부터의 전통에서부터 분리된 개인은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정체성이 자신의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 선택이 자율적이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위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정체성이란 시간을 넘어도 한결같음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전통사회에서는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불안감이 팽배한 현 사회에서 과연 ‘한결같음’이 보장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거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기든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탈전통사회의 성원들은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게 된다. 적어도 전통으로부터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다. 결국 개인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은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상황들을 받아들이면서 정체성을 선택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선택해간다고 하니 고등학교 때 읽은 책 『만약에 말이지』가 생각난다.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저스틴 케이스’로 바꾸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탈전통사회의 개인들도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나가야 한다. 그야말로 눈 앞이 깜깜해질 것만 같은 상황이다. 무엇을 가치관으로 삼아야 하는지, 어떤 것을 직업으로 삼아야 할 지, 무엇을 공부해야 할 지……. 모든 가능성이 눈 앞에 열려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정성과 불안감 속에서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고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며 이 실험적인 사회의 흐름에 멋대로 휩쓸려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분투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상황을 우리가 어찌해도 바꿀 수 없다면 이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좋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최고의 생존방법이 될 것이다.


  “과학은 과거에 가졌던 권위에 특유한 위광 중 상당 정도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어떤 면에서 이것은 과학이 기술과의 관련 속에서 인류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되던 이익에 관한 미몽에서 깨어난 결과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소름끼치게 파괴적인 무기류의 발명, 전지구적인 생태위기, 그리고 금세기에 발생한 사태들은 방해받지 않는 과학연구를 통한 진보를 외치는 가장 낙관적인 옹호자의 열정조차 차갑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과학은 스스로의 전제 위에서 문제틀로 여겨질 수 있고 또 여겨져야만 한다. ‘신성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원칙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며, 과학이 주장하는 권위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p. 135)”

  저자는 지식 또한 탈전통사회에서는 그 확고한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지식 중에서도 과학적 지식은 상당히 오랫동안 여타 지식과는 달리 ‘과학적이다’라는 말 속에서도 보이듯이 절대적 진리인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적 발전이 곧 인류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과학을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이 인간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 준 반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위험성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핵전쟁의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과학이 인간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다. 지구온난화 문제, 환경파괴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현재 과학의 힘으로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결국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지식체계는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고 있다. 과학이 인류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인간이 전쟁 등으로 오히려 더 고통 받고 불안에 떨고 있다. 탈전통사회에서는 지식조차 권위를 잃고 사람들이 무엇을 절대적으로 옳다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바라보며 손 놓고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이 권위를 잃고 있고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지식체계일지라도 그 속에서 인류의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 과학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만 불안감 속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타개하기 위해서 과학을 통해 노력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탈전통사회에 관한 저자의 논의를 읽으면서 현재 우리가 정말로 불안정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할지 제대로 모르고, 처한 문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보면 절망스러운 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애쓴다면 언젠가 길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길을 찾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처한 이 시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를 제공하는 좋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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