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 강영안의 사도신경강의 1
강영안 지음 / IVP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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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는 “Credo in Deum, Pa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로 시작하고 있다.  “Credo”, 내가 믿습니다 라는 표현이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은 나는 의탁합니다”, “나는 맡깁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속에는 그러므로 나는 감사 드리고 찬양합니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시며 전능자 이시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라는 것이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가장 먼저 하는 고백이다.  라틴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아버지이시고, 전능자 이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이다.  이는 내가 믿는다는 것이 출발점이고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나에게 아버지이며, 전능자이며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순서이다.

     과연 사도신경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에도 아직 유효한 것일까? 서양의 근대문화와 철학이 우리 삶 깊이 들어와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가 이 사실을 신앙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우주론의 도전이다.  진화론을 학교에서 배워온 세대에게 있어서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해서 생긴 공간이 아니라 빅뱅의 산물이다.  빅뱅을 통해서 우주가 시작되었고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고등한 생명체로 진화되었다는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있는 현 시대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둘째,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악의 존재의 양립 문제이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왜 이 땅에 악과 고통이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고백처럼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모든 면에서 선하신 분 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질병, 죽음, 미움, 질투, 불평등, 전쟁 등 많은 악과 고통은 없어야 할 것인데 실제 세상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과 같은 것들을 볼 때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은 분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고통과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전능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셋째, 페미니스트(feminist),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다.  메리 데일리라는 신학자에 따르면 만일 하나님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곧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억지 논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들어보아야 한다.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된 것은 20세기에 와서야 이루어 진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넷째, 생태주의자들의 도전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에 나오는땅을 정복하라라는 명령 때문에 땅이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들이 과도하게 땅을 개발하고 착취하게 되었다.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란 논문의 저자인 린 화이트2세를 따르면, 기독교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는데 큰 기여를 했다.  중세 가톨릭 신부가 미사 전 향을 뿌려 귀신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인간 마음대로 사용하는 방식의 사고방식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환경론자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우리에게 주신 땅에 대한 사명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섯째, 무신론의 도전이다.  ,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무신론에는 실제적 무신론과 이론적 무신론이 있다.  이론적 무신론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환상이고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사도신경의 첫째 구절은 이 모든 반대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존재하고, 아버지이시며 전능하고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러한 반대 주장에도 불구 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까?

     교회는 오랫동안 이러한 질문, 반대에 대해서 무시해오거나 주눅 들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받아들이고, 성경을 통해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3: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와 같이 우리에게는 소망의 근거와 이유에 대하 답변해야 할 의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무신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무신론의 여러 유형 중 증거론적 무신론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믿는데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생각을 증거주의라고 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논리적으로 그 증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연역적, 귀납적, 귀추법적 그 어떤 것을 통해서 증명해 낼 수 없다.  또한 경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들은 증거 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며 이 믿음에 대한 증거를 요구한다.  이들은 증거나 논변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지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거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 우리가 믿는 것이 과연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는가 하는 것이다.   믿음은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할 때, 믿음은 의지가 포함된 신앙이다.  지식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개입되어 있는 것이 신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강요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거나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믿음이란 우리의 의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우리가 증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경우에 증거를 갖다 대야 할 의무가 있는가?  그럴 필요가 없을 뿐 더러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믿음과 생각은 사실 모두 다 따져보지 않고 믿는 것들이다.  우리가 모든것을 일일이 증거를 확인해야 한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을 것이다.  믿음은 믿음 자체로 충분한 것이지 어떤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엘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가 말한 것처럼 그 자체로 어떤 다른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그 자체로 적합한 기초적인 믿음이다.

     계몽주의 이후 무신론이 지닌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의 믿음은 신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지식은 믿음에서 기초한 것임을 볼 때 올바른 생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심에서 출발한 무신론은 결국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환상이나 착각에 불과하다고 보는 태도의 무신론이 있다.  바로 혐의론적 무신론이다.  이들은 우리가 믿는 믿음에는 무엇인가 나쁜 의도가 있다고 본다.  프로이트는 우리에게는 어떤 바람이 있는데 그 바람을 지어낸 생각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종교라고 본다.  그는 종교를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신경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교란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종교를 하나의 착각이요 환상으로 본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자본가와 노동자,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가 있는 이 왜곡된 사회 현실 속에서 고통을 견디게 하는 일족의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현실에 대항해 싸우지 못하고 그 고통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종교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증거주의자들은 신앙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증거가 문제가 아니라 인식기능 자체의 오작동을 인해 신앙이 생긴다고 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착각에 빠져 있으며 실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상상하는 것이 실재처럼 본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인식론자들, 그리고 메롤드 웨스트팔(merold Westphal)의 주장을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기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죄의 영향 때문에 사물과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신은 죄의 결과이다.  이는 로마서 1:19~23에 잘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이 말한대로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지만 우리의 무감각과 죄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지 못한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에게 일족의 인식 기능상의 결함이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환상이나 착각으로 본 것이 실제이고 그들이 현실로 본 것이 오히려 착각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관 중 가장 강력한 사상으로 자연주의와 반실재론, 그리고 세속적 휴머니즘이 있다. 이들 중 자연주의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며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한다. 이 자연주의를 철저히 옹호할 경우 그 결론은 우리 인간의 삶에는 자연 바깥에서 주어진 어떤 근거나 목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곧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반대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와 설계를 수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을 가장 적절하게 발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하여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시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힘써 연구하고 알아야 할 이유이다.

     실제적, 현실적 무신론자의 정의는 디도서 1:16절에 나타나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현실적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신자임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은 의견 가운데 단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그의 세계관과 철학, 삶의 가치는 세상의 그것에 의존해 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은 기대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사야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숨어계시지만 그 능력과 영광을 행하신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해 묻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대답하신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 임재하고, 그 곳에 함께할 자임을 밝혀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모습으로 오신다.  하나님은,”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개념적이거나 형상을 가지신 이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음성을 듣고 말씀을 듣고 알게 되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은 숨어계시면서도 우리에게 개입하시고 찾아오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숨어계시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는 이제 다른 종교를 배격하거나 증명을 요구하기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관용의 태도를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가 사도신경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근대 세계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를 가장 중요한 지적인 기본 태도로 보고 모든 것에 대해서 회의하며 지식의 토대를 쌓아나갔다.  이는 나아가 혐의나 의혹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단지 근대 세계에서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출판된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서는 증거주의적 무신론과 혐의론적 무신론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책에서 신은 인간의 망상이나 환각에 불과하며 신은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반론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주시도록 간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 일상적 삶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능력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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