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쇼크 - 지금까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성경 이야기
조 코박스 지음, 신기라 옮김 / 가나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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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성경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대하는 순간 그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토록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한 것일까? 책 제목 또한 범상치 않다. 『바이블 쇼크』, 분명 성경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일 텐데 무엇이 쇼크고 무엇이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일까?


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 되었고 후에 라틴어, 독일어, 영어 순으로 번역되었음을 언급하고 싶다. 또한 2천 년 전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가 아람어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적 세계관을 가지고 생활 했다는 것과 문서로 기록된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음을 밝혀둔다. 이런 전제 조건이 왜 중요하냐하면 초기 성경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적인 세계관에서 헬라어 성경을 읽더라도 단어나 의미 느낌을 헬라적인 시각이 아닌 히브리적 사고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생이 헬라사람들이거나 세월이 흘러 헬라어 성경을 보던 후대 사람들은 히브리적 사고가 아닌 헬라적 세계관으로 성경을 읽기에 간혹 잘 못 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저자는 성경이 진실이며 사실이라는 것과 신화 사이에서 오는 사람들의 잘 못된 앎이나 지식에 대해서 바른 성경관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의 불일치가 얼마나 심각한 가에 대한 27가지의 주제들을 가지고 연구한 끝에 이 책이 출간되게 되었는데 성경에 관한 내용들이니 종교적 책에 가깝겠지만 저자는 이 책이 “종교”를 다루기 위해 집필한 책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단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나 성경의 내용들이 실상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큰 거리감이 있는지에 대해 거리낌 없이 성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된 모든 내용들에 동의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 하면서 철저한 조사를 했다고 하는데(단순하게 text적인 접근인 것 같다) 저자 역시 현대 미국인의 시각으로 헬라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성경을 읽고 해석을 했다면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해석상의 오류(오류지만 오류라고 생각지 못하는)를 범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돼지꿈”을 꾸면 다음날 복권을 사거나 행운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타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돼지꿈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특히 돼지를 경멸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을 한다면 큰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랜 문화를 간직한 민족과 나라마다 언어에 있어서 상징이라는 것이 있고 성경에서도 이런 상징적 표현과 단어들이 사용되었기에 단순하게 text만을 가지고 연구를 했다면 그 속에서도 또 다른 오류들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러한 예로


첫째, 저자가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의 “삼층천” 체험을 두고 천국은 “세 개다”라고 주장을 한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에겐 “칠층천”, “십이층천”이라는 하늘의 개념이 있다는 것을 저자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둘째, 150p에 언급한 에스겔의 “두여인”을 두고 단순하게 text적인 의미로만 언급을 해서 sex적인 것만 부각을 시켰는데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부부관계를 파기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213p에 언급한 세례요한의 “메뚜기”를 언급하면서 저자가 다른 본문에서는 단어의 의미나 해석을 주장하지만 이 본문에서는 곤충 메뚜기의 의미로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메뚜기”는 곤충 메뚜기의 의미와 눅 15장에서 탕자가 먹었던 “쥐염열매”가 동일한 단어인 것에 대한 설명은 없다.

넷째, 263p에서 예수께서 우화를 들어 설명한 이유에 대해서 고의로 천국의 비밀을 숨겼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앞뒤 문맥들을 살펴봐야 하고 “그 무리”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도 중요하다. 그 무리를 모든 사람들로 지칭하기 보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자칫 무리를 그룹적인 표현으로 사용을 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신천지’의 주장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구원은 모든자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다섯째, 예수님의 제자들을 언급하면서 눅10장에 나오는 70인 제자 파송을 두고 예수의 제자가 12명, 혹은 70명으로 주장을 하지만 부활 후 고전15장에서 500여 형제를 언급할 때 이들 또한 제자의 무리로 봐야 할지 아닐지, 또한 행 2장에 언급된 오순절 성령체험의 주인공 120명을 제자로 봐야 할지 아닐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섯째, 부활에 관하여 설명을 할 때 바울은 초기에는 고전 15장, 살전 4장에서 “우주적 묵시적 종말사상”을 주장하지만 노년이 되었을 때는 고후 5장, 빌 1장에서 “개인적 내세적 종말사상”을 주장을 하고 있다. 사실 죽음 후 부활에 관하여 곧 부활을 ‘한다’, ‘안한다’의 개념적 단편성 접근이나 주장, 결론은 나에게도 어려운 부분이지만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말하기도 어려운 점은 있다.

일곱째, 고전 6장에 언급된 “송사”를 인용해서 이것이 부활 후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거나 천사를 심판한다는 주장은 잘 못 된 것이다. 고전 6장의 본문은 세상의 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어떠한 문제를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지 못 하고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가는 것에 대한 책망적인 부분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심판에 대한 것은 그리스도의 법으로 우리의 삶에서의 선과 악을 가리는 기준으로서의 판단적인 부분인 것이지 심판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롬14;10, 고후5;10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여덟째, 292p에 언급한 엘리사의 대머리를 놀렸던 소년들과 엘리사의 관계에 대해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놀려서 또는 대머리를 놀리고 싶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도 좀 더 깊은 보충이 필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고대인들의 개념에서의 대머리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의 관계 이 내용을 지면에 쓰기에는 너무 많은 분량이라 생략을 하지만 그 관계만 이해를 한다면 소년들이 왜 엘리사를 놀렸는지 이해를 할 것이다. 사실 놀렸다고 하기 보단 엘리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내기를 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아홉째, 구약에 등장하는 “주”, “사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다.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창조하셨던 분임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며 신약에만 존재했던 분이 아니심을 강조하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아브라함과 만났던 “주”를 예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예수가 창조의 주체시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을 알지 못 하거나 믿지 못 하는 사람들 때문에 언급했으리라 생각하지만 때론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위험한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창18;1 에서는 “여호와”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져 있음에도 그분이 예수라고 하는 것과 야곱과 씨름한 사람이 예수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 호 12;4은 천사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잘 못 되었거나 저자의 연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명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가진 이교도적 의미에 대한 설명을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교도적인 다산의 상징으로 성탄 트리를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연구하고 발표한 내용에서는 다분히 이교도적인 색채에 대해 주장을 했고 그것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행위라면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부활절 토끼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인데 미국에서는 부활절에 토끼까지 동원이 된다고 하니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부활의 상징으로 달걀 나눔을 하는데 이것 또한 부활과는 거리가 먼 다신의 상징인 이교도적인 문화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다. 성경에서 부활과 관련하여 토끼나 달걀을 두고 기념을 하진 않지만 현재의 문화에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행위가 이교도적 행위라니 충격일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부활절에 달걀 나눔이나, 성탄 트리장식을 왜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고 단지 외국에서 들여온 문화적인 코드 따라 하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95년 12월 25일 성탄 예배를 베트남에서 드렸을 때 그 곳 교회에서 비스킷을 선물로 받은 기억이 난다. 이런 것들을 나눈다는 것은 이교도적인 행위 보다는 기쁨을 나누기 위한 행위인데 그것이 만약 사탕이나 초콜릿이 가득한 선물바구니라면 어떻게 설명을 할까? 그것 또한 다산의 상징으로 봐야 할까? 때론 순수한 기쁨의 선물을 나누기 위함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예전에 남미여행 다큐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중 교회에서 행하는 종교의식 중에 기복적인 부분과 행위가 상당히 많았음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에 있어서도 성경의 내용과 전혀 다른 혼합주의적인 종교의식이 강했는데 이 책은 올바른 기독교관이나 성경관 확립이 안 된 사람들이 읽기에도 문제가(잘 못된 해석 정립)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따금씩 궁금해지고 잘 못 알고 있던 개념들에 대해서 성경의 text적인 접근은 필요하리라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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