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사계절 1318 문고 123
김민경 지음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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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릴 수밖에 없다.

아픔 중에 가장 오래가고 고통이 심한 게 뭘까? 상실이 아닐까. 그것도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고 느닷없는 통보식의 영원한 이별만큼 크고도 긴 아픔이 또 있을까. 이 순간과 느닷없이 만난 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매 순간이 죽음만큼의 고통이라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열네 살 때 엄마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주인공 새봄이는 그 충격으로 4년 동안 집에만 머문다. 답답함이 몰려오면 무작정 뛰쳐나가 달린다. 이렇게라도 삶의 고통을 덜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달리기만 할 수는 없다. 새봄이는 어떻게 다시 보통의 삶의 궤도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 – 남은 자에겐 결국 사람

다행히 새봄이에겐 남은 사람이 있었고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남은 사람은 아빠다. 아빠는 직장까지 잠시 쉬며 새봄이 곁에 머문다. 그리고 기다린다. 애써 위로하려 들지도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다 받아주며 기다린다. 아내의 상실이 본인에게도 큰 고통이었겠지만 새봄이마저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아빠에겐 삶을 버티는 힘이 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남자아이 지석이가 나타난다. 새봄이가 4년 만에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서 지석이는 새봄이를 (자신도 미처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 ‘알아본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며 지레 평가하기 좋아하는 공간에서 지석이는 새봄이가 왜 달릴까를 생각한다. 더러워진 실내화를 챙겨주고 마침내 새봄이가 운동장을 달릴 때 함께 ‘달린다.’ 이 함께 달리는 것으로 새봄이와 지석이의 연애도 시작되지만 새봄이의 치유도 본궤도에 오른다. 새봄이에게 달리기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에 지석이가 함께 해 줌으로써 새봄이는 큰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함께 달리며 서로의 들숨과 날숨이 동기화되면서 새봄이는 고통을 견디는 게 ‘혼자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세월호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 이별과 남은 자의 고통이라는 점에서 세월호는 마치 블루스크린처럼 소설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새봄이 엄마의 발인 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고 지석이가 새봄이 곁에서 함께 달린 날도 4월 16일이다. 봄이 올 때마다 고통 속에 괴로워해야 할 새봄이에게 봄은 동시에 치유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독자들은 새봄이의 슬픔을 보면서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이들의 상처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도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왜 광화문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지석이가 새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생각’했는지, 함께 들숨과 날숨을 동기화하며 달렸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새봄이 엄마처럼 당한 ‘사고’가 아니고 ‘사건’으로서 해결된 게 없는데 너무 쉽게 가슴에 묻어두라며 짐짓 위로하는 척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심히 듣고만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며칠 전에도 대형화재 사고로 준비 안 된 이별을 한 이웃을 봐야 했고 이런 일은 작든 크든 일상적으로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때 남은 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임을, 그것이 살아감의 힘이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힘 – 떠난 자에겐 기억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에는 죽은 자들의 세계가 나온다. 죽은 자들은 이생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존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죽었지만 기억되면 존재하는 것이다. 새봄이 또한 <모비 딕>을 읽으며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완전한 소멸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석이와 함께 고인돌을 찾아 엄마와의 기억과 서로의 기억을 묻는다. 천고의 세월을 존재하는 고인돌처럼 기억 또한 존재할 것이고 기억이 존재한다면 떠난 자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자. 우리.. 안타깝게 떠난 이들을..


그리고 <모비 딕>

이 소설은 <모비 딕>에 대한 소설적 서평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비 딕>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모비 딕>이 어떤 소설인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소설로서 소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새봄이가 <모비 딕>을 처음 만난 건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봄이와 지석이가 <모비 딕>을 읽고 얘기를 나누면서 <모비 딕>은 삶이 주는 황홀과 경이, 처절한 고독마저 의식하면서 다시 느껴보고픈 ‘살아있음’의 소설이 된다. 욕망으로 인한 파멸에서 살아있음의 소설로..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모비 딕>의 책장을 넘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내가 위로되는

요즘 10대들의 삶은 쉽지가 않다. 며칠 전 받아든 신입생 정서행동검사 결과지에도 예외 없이 자살 위험군 표시가 빨갛게 되어 있다. 교사로서, 기성세대로서 책임감이 무겁다. 그 무거움을 이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비 딕>이 새봄이에게 그랬듯이 이 소설은 마치 치유의 손길처럼 독자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자연스럽게 삶의 의욕을 채워 줄 것이다. 더불어 10대 시절의 (특히 책을 통한) 연애가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선물이다. 새봄이와 지석이의 마음 씀씀이를 따라가다보면 절로 마음이 따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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