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아파도 괜찮아, 사랑했잖아
정혜
우애령 지음 / 하늘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한 권의 책에 온통 마음을 사로잡히고, 꾹꾹 눌러 밑줄 치고 옮겨 적는다. 나는 한 권의 책이 갖고 있는 무게 만큼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한밤중에 갈 곳이란 아파트앞 마트. 떨이 물건 파는 아저씨도, 야채 비싸기로 소문났다며 마트의 상인과 실갱이를 하는 사나운 주부도, 배달되냐 물어보며 양 손 가득 비닐 봉지 들고 가는 새댁도 나를 그냥 지나친다. 이미 나는 어떤 주문에도 사랑으로 일관할, 정성 가득 담긴 사랑의 답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데도 아무도 내게 말걸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밀린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나는 언제든 촉촉히 울어줄 준비가 되어있거만, 어쩐지 친구는 사랑 얘기는 뺀 나머지 이야기만 한다. 나만 읽은 한 권의 책, 다함께 읽는다해도 우리 같은 마음 되긴 어려울라나...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종교 의식처럼 한 권의 책을 읽은 뒤엔 남아있는 그 마음이 오래오래 간직되어 틈틈이 찾아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린 말이 통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한 권의 책으로 좁혀지는 마음은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언제쯤 나와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 내 마음을 부끄럽지 않게 보여줄 수 있을까.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이라고 하기에 나는 정말 그렇네 하며 피식 웃었다. 사랑의 다른 말은 뭐게? 내가 내게 묻고 내가 대답한다. 사랑의 다른 말은 배신. 사랑의 유의어는 배신. 사랑의 기원은 배신과 질투.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시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무얼 먹으며 자주 쓰는 단어를 관찰하게 되고 기억해둔다. 그랬다가 그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그사람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주려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주려 했다가는 이기적이니 고집쟁이니 하는 말을 언젠가는 듣게 될 것이다. 왼손등에 오른손이 잘못하여 갈겨놓은 상처가 생겼다. 아주 경미한 상처였고 살갗이 조금 벗겨지더니 피가 살짝 묻어났다. 그런데, 그 상처가 벌써 한달째 손등에 남아있다. 상처는 아주 조금씩 아물고 있다. 누가 보더니 날카로운 것에 단단히 긁힌 줄 알았다고 했다. 사랑이 남긴 상처는 보이진 않아 더 오래간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는 걸 볼 수 있어 곧 없어질거라는 걸 확신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매일 꾸는 꿈처럼 지겹게 나타나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과 배신과 상처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자처해서 슬퍼지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든든한 남편과 알토랑 같은 아이들을 키우며 그들이 빠져나간 집안에 홀로 남아 뭔가 서글퍼지는 마음이긴 한데 정체를 모르겠다면 한번 읽어보기를. 아주 고요한 일상,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 일상속에 <정혜>는 탁상시계만한 반경을 오간다. 우체국과 집, 집과 우체국. 어떤 일이 생길래야 생길 수도 없는 일상은 정혜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 정혜는 어린 시절에 생긴 상처 때문에 인생이 주는 덤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우표만한 크기로 살아갈 뿐이다. 상처를 받았다면 회복해 가는 과정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상처가 없었다면, 정혜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그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일도 없었겠지...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숨막힐 정도로 차분하다. 흔들림 없이 단숨에 써내려간 것 같은 냉정함, 작가만의 문체를 뽐내지 않고 정혜, 라는 아픈 인물을 위해 배려하고 있는 문체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다섯 여자의 이야기 <가구>는 이 소설집에서 단연코 밑줄을 많이 친 소설이다. 공감해서다. 어지러져 있던 불투명한 내 생각을 정리해서다.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허상은 자기 만족이다. 나를 만족하게 했으면 사랑하게 되는 뻔한 진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 속으면서 또 그립게 되는 사랑의 정체는 치사량의 수면제보다 더 독하다. 사랑때문에 울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번 빌미가 생기면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 달려든다. 사랑은 얼굴을 바꾼다, 집착으로. 미련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가정을 버린 아버지. 아버지를 비난했던 딸은 아버지와 같은 인생이 된다. 아버지는 결국 사랑하는 여인과 외딴 곳에서 살다 조용히 숨을 거두고, 딸은 이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는 오랫동안 사랑이 저질러온 만행을 이야기한다. 얼굴만 닮는 것이 아니라 인생도 닮게 되는 가족. 사랑도 대물림하듯 비슷한 유형의 사랑을 맞이하게 되는 딸. 사랑은 시대와 유행에 얼마나 민감한 것인지 아버지보단 조금 나은 모습으로, 떳떳한 모습으로 딸은 사랑을 찾아 떠난다.

흠이라면, 등장인물의 직업군이 의사 혹은 의대와 관련이 많아 연작소설인가 싶은 의혹을 산다. 특정한 종교가 자주 거론되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몇 줄로 나오는 건 이해하는데 한 단락이 의도적이다 싶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열 두 편의 단편은 치마는 같은 것을 입고 저고리만 갈아입는 것 같아 아쉬웠다.

사랑을 빼고나면 할 말이 반으로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지구인들은.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는 인생은 어쩌면 더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때문에 사람도 알게 되고 사랑때문에 세상도 알게된다.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하는 게 인생의 비밀을 쉽게 알게 되는거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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