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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부활
폴 오머로드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사회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은 왜 살아가고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문제가 항상 궁금했다. 어쩌면 내가 어릴 때부터 인문사회과학 책을 즐겨 읽은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사회학이나 정치학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수능을 치고 나서 읽은 책 한권으로 나는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말았다.
그 책은 미시경제학의 대가인 서울대 이준구 교수가 쓴 [새열린경제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고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경제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위한 경제학 입문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책 맨 마지막에 보면 이준구 교수는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의 명언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책을 마친다.
“경제학은 우리에게 던져진 수많은 문제들을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풀어나가길 요구한다. 만약 당신이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면 경제학을 공부하라.”
아,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짧으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당장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나 처음 대학에 입학해서 경제학을 배우면서 나는 경제학은 참 따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과 사회를 논리적으로 분석할 것이라는 경제학은 도무지 사람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오직 인간의 효용과 조직의 효율이라는 목표를 위해 분주히 계산하고 따지는 일종의 병법(兵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점은 나를 경제학으로 이끈 이준구 교수가 사실은 그러한 효용과 효율을 분주히 계산하는 미시경제학자라는 것이다.
여하간에, 그러면서 나의 관심은 당연히 강의실이라는 제도권 경제학에서 벗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경제학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경제학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런 때 나에게 새로운 경제학의 길을 보여준 책이 있었다. 바로 영국의 경제학자인 폴 오머로드 쓴 [경제학의 부활]이다.
경제가 어렵다. 그러자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경기 부양책을 발표했다.
"세금을 X% 낮추고, 공공지출을 Y% 만큼 늘리고, 금리를 Z% 만큼 변화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새로운 경기 부양책이 발표되었음에도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최고의 경제 전문가와 관료들이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현실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때 저자는 과감히 주장한다.
"정통 경제학(기존 경제학)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저자는 정부의 경기 부양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정부(혹은 경제 전문가)가 가진 기본적인 경제관념이 기존 경제학의 개념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 [경제학의 부활]은 그 영어제목이 '경제학의 죽음(The death of economics)'이다. 여기서 죽음을 맞이한 경제학이란 바로 기존 경제학을 의미한다. 저자는 기존 경제학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 개념이 정립된 경제학은 과학기술의 수리적 개념을 받아 들여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이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의 미덕은 합리성과 균형(Equilibrium), 그리고 그 균형의 일관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론상의 합리성과는 별개로 현실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균형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현실세계의 복잡다양한 문제들을 외면한 채 수리적인 개념만을 고집하던 기존 경제학은 이제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채,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특히 실업문제에 있어서)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제적 논쟁의 초점을 오로지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비판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실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유학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잃고 공리공담에 빠진 것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 경제학의 비현실성을 벗어나 현실에 뿌리를 둔 새로운 경제학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기존 경제학의 비현실성을 생각해 보자.
완전경쟁시장의 가정은 경제학에서 가장 밑바탕이 되는 이론이다.
경제학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되며 그 전제조건은 바로 어떠한 수요자나 공급자도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공급자가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동일해야 한다는 즉, 그 누구도 시장지배력을 가지지 못하는 완전경쟁시장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이와 같은 완전경쟁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극단적인 경우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벌과 일부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이 거의 모든 시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공급자들이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경우도 가격은 물론, 디자인과 기능까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경제학자들은 마치 독실한 신앙인처럼 완전경쟁시장 이론을 신봉해 왔다. 단지 완전경쟁시장 이론이 자유시장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가장 쉽고, 조화와 균형이라는 수리적 개념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알맞다는 이유로...
한 나라의 경제성장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는 거시경제 지표들을 이용한다. 최근에 가장 중요한 거시 경제지표로 인식되는 것은 GDP(Gross Domestic Product)다. 실제로 거시경제 지표는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수치적이며 회계적인 계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단순히 GDP같은 거시경제 지표의 성장만으로 그 나라를 무조건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저자도 이러한 거시경제 지표가 중요하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세계와 인간을 둘러싼 환경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 즉, 기존 경제학에서 생각하는 거시경제 지표에는 사회가 돌아가는 제도적, 환경적, 문화적 수준의 지표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도적, 환경적, 문화적 수준의 지표를 고려하고, 계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포함하여 계산된 거시경제 지표의 재정의(再定義)는 보다 넓은 안목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정부 정책의 방향을 단순히 수치적 분야나 재정적 분야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회, 문화와 제도 각 분야가 연결된 공공분야에 까지 그 중요성을 넓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왜 경제가 발전해도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않는지, 왜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동남아 국민의 행복지수가 미국보다 높은지의 궁금증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화폐공급량과 인플레이션의 관계를 보면, 일반적으로 화폐공급량이 증가할 때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처럼 되고 말았다. 사실 세계 각국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며 힘이 센 이유도 각국의 화폐공급량을 조절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인플레이션이 단지 화폐공급량의 영향만을 받는다는 논리나, 인플레이션이 화폐공급량과 지속적이며 예측 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논리는 비웃음만 살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플레이션은 경제 및 사회 각 부분의 종합적인 문제이지 기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기계론적이며 수리적인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필립스 곡선(Philips curve)을 보자. 필립스 곡선이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상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곡선모형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증가하면 실업률은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감소하면 실업률은 증가한다는 이 필립스 곡선은 전혀 역사적인 데이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둘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필립스 곡선은 아직까지 전 세계 지도자들을 오도하며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 성장과 실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존 경제학자들은 경제 성장과 실업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며, 그 확실치도 않은 가정들을 전제조건으로 깔고 경제를 진단했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다면 그것은 단기적인 관계일 뿐이다. 만약 경제가 생산량과 취업을 연결시켜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경제 성장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실제로 미국과 독일, 영국 등은 기존의 경제학자들이 생각한 경제 성장과 실업의 관계가 뚜렷이 증명되지 않는 경우였다. 반면 일본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경제 성장과 실업의 관계가 증명이 된다. 결국 어떤 나라를 모델로 택해서 표본으로 세우느냐에 따라 그 이론의 성패가 극명히 나뉠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대다수의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경제학 이론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념들로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전혀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명백한 문제들의 근원, 기존 경제학자들이 가지는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미 이야기 했듯 그것은 기존 경제학자들의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세계를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기계로 간주하는 기존 경제학자들은 어떤 경제적 문제가 생겼을 때 톱니바퀴의 회전수를 바꾸거나 마모된 톱니바퀴를 교체하듯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 그동안 기존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데이터와 이론들을 뒤섞어 경제를 설명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치 있고 중요한 작업들을 이용해 세계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구성되어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세계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규범적인 주장만을 되풀이 해 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계란 인간과 사회, 제도와 문화 등 온갖 복잡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유기체와 같은 존재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는 접근 할 수 없는 이런 세계의 문제는 단순히 부속품을 수리하듯 부분적인 수정이나 교체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의 간곡한 바람은 이것이다.
"기계적이고 일차원적인 세계의 평균적인 이성적 행동 양식에 대한 정통 경제학의 개념을 버린다면, 경제 조직들의 행동 양식에 대해 보다 확실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며, 이러한 이해는 인간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학자가 세상을 공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내가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들었던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말을 떠 올려 본다.
이 말은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경제학과 관련된 말 중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이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경제학이 고급철학이나 순수과학에 비해서 그렇게 쉬운 학문일까? 쉬운 학문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는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이런 역설이 성립하는 것은 아마도 경제학의 대가가 되려면 아주 희귀한 재능의 조합(Combination)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역사학자, 정치가, 철학자여야 한다. 그는 수학의 기호를 이해하면서 이를 말로 설명해야 한다. 특수한 현상을 일반적 관점에서 사고해야 하고, 구상(Concrete)과 추상(Abstract)을 같은 사고의 틀로 건드려야 한다. 그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과거의 관점에서 연구해야만 한다. 인간의 속성이나 제도의 어느 부분도 완전하게 그의 관심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의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무관심한 마음상태에 있어야 한다. 예술가처럼 초연하고 청렴하면서도, 어떤 때는 정치가처럼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정말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