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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의 명상으로 10억을 번 사람들
오시마 준이치 지음, 박운용 옮김 / 나라원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10년전에 읽었던 책이 표지를 달리하고 새롭게 나왔었다.

10년전에는 검은색 표지에 제목을 은박으로 해서 고급스럽게 보였었는데.... 그동안 그 책을 잃어버린 채 지내다 몇 달전 도서 안내 리스트에서 보고는 다시 구입을 한 책이고 한번을 읽고나서 다시 반복해서 계속 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잠재의식-무의식 에 대한 이야기를 실화를 곁들어 풀어쓴 책이다.

단순히 잠재의식이란 이런것이다... 라는 이론서나 잠재의식과 현실생활에 대한 형식적인 이야기의 책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생활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잠재의식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실용서 형식의 책이다.

 

읽을수록 자신과 주변이 변화되는 것을 빠른시간 내에 혹은 장시간 뒤에라도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재의식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분야일지도 모른다.

일이 생겨서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에 머리 속으로 시계를 그리고 시계바늘을 자신이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 맞춰놓는 상상을 한 다음 잠자리에 들면 어김없이 그 다음날 자신이 생각한 시간에 눈을뜨고 일어나게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실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작은 잠재의식의 실체다.

 

이 책은 그러한 잠재의식의 무한한 가능성과 이용하기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바뀌고 소원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요지는 쉽게 말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를 보다 실천적이게 가르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큰 꿈을, 가능한 그릴 수 있는 최대의 큰 꿈을 마음속에 그리고 생각하고 잠재의식에 투영하면 이루어 질 수 있다니 2005년을 시작하는 오늘부터 다시 새로운 꿈을 만들고 이루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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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백년고독 > 마르셀 에메에 빠지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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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문학의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마르셀 에메. 우화같은 짧은 이야기의 귀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엉뚱한 발상과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였다. 그것도 1900년대 초에 말이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왜 마르셀 에메의 작품을 이제야 접하게 되었는지 참나....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는 모두 5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그 중 첫번째 에피소드가 바로 '벽으로...' 이다. 그의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보자.
 
  첫번째 '벽으로..'는 한 남자에게 특이한 재능이 있다. 바로 벽을 뚫고 드나드는 재능이다. 그의 기이한 능력을 43살에 알아버린 주인공은 그를 못살게 구는 직장상사를 골려준다. 그리고 그것도 무료해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벌리려고 한다. 바로 은행을 터는것...
 
  두번째 에피스드인 '생존시간카드'는 이책중에서 가장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독특한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나는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엉뚱한 발상이 흠뻑 묻어나는 내용이다. 노동계급으 수익향상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의 배급을 제한하고자 한다. 바로 사회에 필요없는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것. 노인, 퇴직자, 금리생활자, 실업자 등. 방법은 생존카드를 배급하는것인데, 온전한 사람은 한달을 모두 살아갈 수 있는 30일 생존카드를 배급하고, 그외의 노인, 퇴직자, 금리생활자는 한달의 반인 15일만 살수 있는 카드를 발급하는것. 그래서 15일 카드를 받은 사람은 1일부터 15일까지만 살고 다음날부터 말일까지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음달 1일날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기발한 아이디어속에서 벌어지는 헤프닝이 계속이어진다.
 
  세번째 에피스드 '속담'은 학교에서 속담의 예를 들어오라는 숙제때문에 벌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우화적으로 담겨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속담숙제를 대신해준다. 과연 이 숙제를 본 선생님의 반응이 어떻할지....이 작품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었던것 같다. 어쩌면 우리들의 옛날 아버지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네번째 작품 '칠십리장화'또한 전설의 칠십리장화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구들의 부모, 그리고 주인공과 주인공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정신없이 펼쳐진다. 과연 신으면 한번에 칠십리를 간다는 장화는 누가 차지하게 될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칠십리장화'에 나오는 장화를 파는 주인이 낮이 익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월트디즈니사의 "벅스라이프"를 기억할 것이다. 벅스라이프에 실려있는 단편 영화 부문에서 아카데미 상을 받았던 "게리의 게임(Geri’s Game)"의 게리의 캐릭터가 이사람과 흡사하다. 혼자 체스를 두면서 하는 행동과 표정들이 거의 비슷하게 묘사되어있다. 아마도 마르셀 에메의 "칠십리장화"에서 영감을 얻은 듯...
 
  다섯번째 작품 '천국에 간 집달리'는 늘 악한일만 행한 집달리가 죽어 하늘에 올라가 벌어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죽어 천국에 올라간 집달리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갈지.. 
 
  마르셀 에메는 짧은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프랑스에는 '마르셀 에메 광장'과 '벽을 막 통과하는 에메 동상'이 서 있을 정도이다.  마르셀 에메가  왜 프랑스가 낳은 대단한 국민작가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른이 읽는 우화적이고 때로는 기담집이기도 하고 동화스럽기도한 마르셀 에메의 작품을 만나게 된것은 아마도 행운일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 시리즈와 초록망아지를 읽어봐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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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맨
김종래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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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서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새삼 힘들고 지칠 때면 그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일찍이 어른들은 역사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아마도 이 뜻인가 싶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게도 그 수많은 영웅에서도 꼭 순위를 가리려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생존기간, 그가 이룩한 업적, 만들어낸 성과, 지배한 땅, 심지어는 그가 전쟁터에서 죽인 인명까지 다 계산해서 영웅의 순위를 매긴다. 여하간,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웅이 있다. 바로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복자, 칭기스칸이다.
칭기스칸은 1162년 몽골고원에서 1227년 원정지에서 병사할 때까지 오직 앞만 보고 내달렸던 영웅이다.(칭기스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들이 많다. 1155년 설, 1167년 설 등이 있으나 이 책에서는 1162년을 그의 출생년으로 보고 있다.) 그가 60평생을 살면서 이룩한 업적과 끼친 역사상의 영향에 대해서는 단지,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많은 땅을 지배했다는 비교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칭기스칸의 모습은 흡사 야만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털모자를 쓰고 한 손에 창을 들고는 말을 달리며 적을 죽이는 몽골전사의 모습, 거친 고원에서 움막 같은 겔을 치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 몽골부족의 모습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실제로 칭기스칸의 위인전이나 다른 역사책을 찾아보아도 막북(漠北)이라 불리며 야만족 취급을 받은 몽골부족들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는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몽골전사들의 전투력과 칭기스칸의 천부적인 재능이 몽골제국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물론 지도자의 뛰어난 능력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막강한 전투력이 광활한 몽골제국 건설에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시스템적인 이유, 어떻게 이슬람이나 중국 같은 문명국가에서는 존재하지 못한 지도자의 뛰어난 능력과 병사들의 죽음을 모르는 막강한 전투력이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부족국가에서 나타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책이 바로 [밀레니엄맨]이다.

저자는 몽골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유목민족 특유의 이동 마인드”로 설명하고 있다. 목축과 수렵으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집단생활을 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유재산의 개념이 없어지면서, 수평적, 창의적 봉사정신을 가지게 된 유목민족. 복잡하고 정해진 법이 없이 천지자연의 계시에 따라 명을 부여받고 관료에 의한 통치보다는 오지 회의를 통한 통치를 받으며 사람이 신분보다 그가 가진 기술과 능력을 더 중시하는 유목민족.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혹독한 생존기법을 터득하고, 거추장스러운 형식과 과정보다 분명한 결과를 중요시 여기며, 개방적이고 낙천적인 유목민족...
문명국가의 마인드가 농경민족 특유의 정착 마인드라면, 춥고 척박한 고원에서 야만족처럼 살아온 몽골부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유목민족 특유의 이동 마인드였다. 오랜 세월 정착생활을 하면서 타성에 젖고 게을러진 문명국가가 몽골부족에게 여지없이 무너진 것은 불을 보듯 당여한 일.
이 때 눈여겨 볼 것은, 유목민족의 이동 마인드는 단지 전투기술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동 마인드는 정치, 인재양성, 생산과 분배에 까지 심어졌다. 그래서 몽골제국은 약 200년 가까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래서 칭기스칸은 죽기 전 그의 후손들에게 유목민족의 이동 마인드를 잃지 말라는 “내 자손들이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서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는 유훈을 남긴 것이다. 

지금까지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유목민족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시스템직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면, 개방성, 속도 중시, 능력 중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끈 지도자, 칭기스칸은 어떤 능력과 리더쉽을 발휘하였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칭기스칸이 능력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들을 하고 있지만, 특히 나의 주목을 끄는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첫째는 그의 정보 활용능력이다. 현대사회는 정보사회이며, 따라서 현대의 전쟁도 정보전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소수의 병력으로도 삽시간에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보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과거 박정희에 의한 군사쿠데타,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상대에 비해 정보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칭기스칸은 당시에 벌써 정보의 활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당계급인 샤먼들을 이용해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면서 상대방의 정보를 재빨리 입수하는데 노력했다. 한편으로 이동이 자유롭고 다양한 지역을 오가는 상인들을 우대하고 상업을 장려함으로써 경제력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서 전략을 세워나갔다. 상업을 장려하여 경제력을 향상시키면서도 정보를 활용하는 기술은 뒷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일본 전국을 통일할 때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계책인데, 글자도 몰랐던 칭기스칸은 벌써 400년 전에 그 같은 계책을 생각해낸 것이다.

둘째는 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는 회의 “코릴타”의 개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칭기스칸이 틈만 나면 크고 작은 코릴타를 개최하여 문제를 논의하고 전략을 세워나갔다고 말한다. 이는 나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미 말했듯 우리는 몽골부족이나 칭기스칸은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으로 오직 강성한 전투력만 믿고 세계를 제패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강성한 전투력 뒤에는 코릴타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수많은 영웅들이 명멸해간 전국시대에서 최고의 명장을 꼽으라면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들 수 있다. 그의 귀신같은 책략과 전투력은 그의 기마부대를 전국 최강으로 만들었으며 그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연합군을 편성해서야 겨우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다케다 신겐이 이처럼 강력한 기마부대를 가질 수 있었던, 귀신같은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많지만 전술회의도 빼놓을 수 없다. 다케다 신겐은 전투에 나서기 전, 전투가 끝난 후 언제나 회의를 통해 전투를 분석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이 같은 철저한 전술회의가 그의 군대를 사상 최강의 기마부대로 만들어준 것이다.
칭기스칸에게 코릴타는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의 능력과 리더쉽도 이동 마인드에서 비롯되었음은 당연한 말이다.

이 책 [밀레니엄맨]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시스템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단편적인 현상만을 기억해온 칭기스칸과 그의 몽골제국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보여준다.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말로 용어의 해석상 흔히 “도덕적 혼란”으로 해석되어 윤리나 가치관의 혼돈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럴 해저드란 사실 시스템의 혼란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되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해결 보다 단편적인 현상에 치중하는 것을 우리는 모럴 해저드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칭기스칸에 대해 모럴 해저드를 겪어왔고, 그래서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가치 “이동 마인드”를 제대로 얻어내지 못했다. 단지 칭기스칸이라고 하면 그의 대제국 건설만 대단하다고 생각해왔을 뿐, 그가 어떻게 그런 대제국을 건설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일찍이 E H. 카(E H. Carr)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칭기스칸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칭기스칸과의 올바른 대화법을 가르쳐준다.

조선일보의 조갑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팍스 몽골리카”를 내세우며 한민족의 세계제패를 거론한다. 나는 과거에 단편적이 칭기스칸의 기록, 야만족에 가까운 몽골부족의 모습만 알고 있었을 때는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팍스 몽골리카”가 어떤 배경에서 등장했는지 수긍이 간다.
이제 무더운 여름이다. 곧 휴가철이 시작된다. 이맘때쯤이면 으레 “CEO가 추천하는 휴가철에 읽을 책”, “휴가철에 읽으면 좋은 책“ 등이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한다. 이 책 [밀레니엄맨]도 휴가철에 읽으면 아주 좋은 책이 될 것이다. 1998년에 출판되어 시간이 지난감이 있지만, 지금 읽어보아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나저나, 저자가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문체가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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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부활
폴 오머로드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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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사회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은 왜 살아가고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문제가 항상 궁금했다. 어쩌면 내가 어릴 때부터 인문사회과학 책을 즐겨 읽은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사회학이나 정치학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수능을 치고 나서 읽은 책 한권으로 나는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말았다.
그 책은 미시경제학의 대가인 서울대 이준구 교수가 쓴 [새열린경제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고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경제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위한 경제학 입문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책 맨 마지막에 보면 이준구 교수는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의 명언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책을 마친다.
“경제학은 우리에게 던져진 수많은 문제들을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풀어나가길 요구한다. 만약 당신이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면 경제학을 공부하라.”

아,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짧으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당장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나 처음 대학에 입학해서 경제학을 배우면서 나는 경제학은 참 따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과 사회를 논리적으로 분석할 것이라는 경제학은 도무지 사람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오직 인간의 효용과 조직의 효율이라는 목표를 위해 분주히 계산하고 따지는 일종의 병법(兵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점은 나를 경제학으로 이끈 이준구 교수가 사실은 그러한 효용과 효율을 분주히 계산하는 미시경제학자라는 것이다.
여하간에, 그러면서 나의 관심은 당연히 강의실이라는 제도권 경제학에서 벗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경제학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경제학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런 때 나에게 새로운 경제학의 길을 보여준 책이 있었다. 바로 영국의 경제학자인 폴 오머로드 쓴 [경제학의 부활]이다.

경제가 어렵다. 그러자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경기 부양책을 발표했다.
"세금을 X% 낮추고, 공공지출을 Y% 만큼 늘리고, 금리를 Z% 만큼 변화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새로운 경기 부양책이 발표되었음에도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최고의 경제 전문가와 관료들이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현실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때 저자는 과감히 주장한다.
"정통 경제학(기존 경제학)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저자는 정부의 경기 부양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정부(혹은 경제 전문가)가 가진 기본적인 경제관념이 기존 경제학의 개념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 [경제학의 부활]은 그 영어제목이 '경제학의 죽음(The death of economics)'이다. 여기서 죽음을 맞이한 경제학이란 바로 기존 경제학을 의미한다. 저자는 기존 경제학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 개념이 정립된 경제학은 과학기술의 수리적 개념을 받아 들여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이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의 미덕은 합리성과 균형(Equilibrium), 그리고 그 균형의 일관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론상의 합리성과는 별개로 현실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균형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현실세계의 복잡다양한 문제들을 외면한 채 수리적인 개념만을 고집하던 기존 경제학은 이제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채,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특히 실업문제에 있어서)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제적 논쟁의 초점을 오로지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비판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실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유학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잃고 공리공담에 빠진 것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 경제학의 비현실성을 벗어나 현실에 뿌리를 둔 새로운 경제학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기존 경제학의 비현실성을 생각해 보자.

완전경쟁시장의 가정은 경제학에서 가장 밑바탕이 되는 이론이다.
경제학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되며 그 전제조건은 바로 어떠한 수요자나 공급자도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공급자가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동일해야 한다는 즉, 그 누구도 시장지배력을 가지지 못하는 완전경쟁시장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이와 같은 완전경쟁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극단적인 경우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벌과 일부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이 거의 모든 시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공급자들이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경우도 가격은 물론, 디자인과 기능까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경제학자들은 마치 독실한 신앙인처럼 완전경쟁시장 이론을 신봉해 왔다. 단지 완전경쟁시장 이론이 자유시장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가장 쉽고, 조화와 균형이라는 수리적 개념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알맞다는 이유로...

한 나라의 경제성장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는 거시경제 지표들을 이용한다. 최근에 가장 중요한 거시 경제지표로 인식되는 것은 GDP(Gross Domestic Product)다. 실제로 거시경제 지표는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수치적이며 회계적인 계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단순히 GDP같은 거시경제 지표의 성장만으로 그 나라를 무조건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저자도 이러한 거시경제 지표가 중요하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세계와 인간을 둘러싼 환경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 즉, 기존 경제학에서 생각하는 거시경제 지표에는 사회가 돌아가는 제도적, 환경적, 문화적 수준의 지표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도적, 환경적, 문화적 수준의 지표를 고려하고, 계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포함하여 계산된 거시경제 지표의 재정의(再定義)는 보다 넓은 안목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정부 정책의 방향을 단순히 수치적 분야나 재정적 분야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회, 문화와 제도 각 분야가 연결된 공공분야에 까지 그 중요성을 넓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왜 경제가 발전해도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않는지, 왜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동남아 국민의 행복지수가 미국보다 높은지의 궁금증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화폐공급량과 인플레이션의 관계를 보면, 일반적으로 화폐공급량이 증가할 때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처럼 되고 말았다. 사실 세계 각국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며 힘이 센 이유도 각국의 화폐공급량을 조절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인플레이션이 단지 화폐공급량의 영향만을 받는다는 논리나, 인플레이션이 화폐공급량과 지속적이며 예측 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논리는 비웃음만 살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플레이션은 경제 및 사회 각 부분의 종합적인 문제이지 기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기계론적이며 수리적인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필립스 곡선(Philips curve)을 보자. 필립스 곡선이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상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곡선모형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증가하면 실업률은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감소하면 실업률은 증가한다는 이 필립스 곡선은 전혀 역사적인 데이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둘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필립스 곡선은 아직까지 전 세계 지도자들을 오도하며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 성장과 실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존 경제학자들은 경제 성장과 실업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며, 그 확실치도 않은 가정들을 전제조건으로 깔고 경제를 진단했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다면 그것은 단기적인 관계일 뿐이다. 만약 경제가 생산량과 취업을 연결시켜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경제 성장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실제로 미국과 독일, 영국 등은 기존의 경제학자들이 생각한 경제 성장과 실업의 관계가 뚜렷이 증명되지 않는 경우였다. 반면 일본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경제 성장과 실업의 관계가 증명이 된다. 결국 어떤 나라를 모델로 택해서 표본으로 세우느냐에 따라 그 이론의 성패가 극명히 나뉠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대다수의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경제학 이론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념들로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전혀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명백한 문제들의 근원, 기존 경제학자들이 가지는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미 이야기 했듯 그것은 기존 경제학자들의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세계를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기계로 간주하는 기존 경제학자들은 어떤 경제적 문제가 생겼을 때 톱니바퀴의 회전수를 바꾸거나 마모된 톱니바퀴를 교체하듯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 그동안 기존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데이터와 이론들을 뒤섞어 경제를 설명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치 있고 중요한 작업들을 이용해 세계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구성되어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세계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규범적인 주장만을 되풀이 해 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계란 인간과 사회, 제도와 문화 등 온갖 복잡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유기체와 같은 존재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는 접근 할 수 없는 이런 세계의 문제는 단순히 부속품을 수리하듯 부분적인 수정이나 교체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의 간곡한 바람은 이것이다.
"기계적이고 일차원적인 세계의 평균적인 이성적 행동 양식에 대한 정통 경제학의 개념을 버린다면, 경제 조직들의 행동 양식에 대해 보다 확실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며, 이러한 이해는 인간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학자가 세상을 공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내가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들었던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말을 떠 올려 본다.
이 말은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경제학과 관련된 말 중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이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경제학이 고급철학이나 순수과학에 비해서 그렇게 쉬운 학문일까? 쉬운 학문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는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이런 역설이 성립하는 것은 아마도 경제학의 대가가 되려면 아주 희귀한 재능의 조합(Combination)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역사학자, 정치가, 철학자여야 한다. 그는 수학의 기호를 이해하면서 이를 말로 설명해야 한다. 특수한 현상을 일반적 관점에서 사고해야 하고, 구상(Concrete)과 추상(Abstract)을 같은 사고의 틀로 건드려야 한다. 그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과거의 관점에서 연구해야만 한다. 인간의 속성이나 제도의 어느 부분도 완전하게 그의 관심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의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무관심한 마음상태에 있어야 한다. 예술가처럼 초연하고 청렴하면서도, 어떤 때는 정치가처럼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정말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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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종교 유교
가지 노부유키 지음, 이근우 옮김 / 경당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유교가 종교인가. 아니면 도덕인가.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학문인가. 혹은 이 모든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그 무엇인가. 사람들은 간혹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방의 종교를 묻고는 한다. 종교는 사람의 정신을 가장 고차원적으로 지배하는 기제이기 때문에 그의 종교를 통해서 처음 보는 사람의 교양수준이나 가치관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런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종교는 유교라고 말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왜 종교냐고 되묻는다.
사실 이렇게 묻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얼핏 보아도 유교에 어떤 특별한 종교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유교에는 효나, 예, 충과 의에 대한 가르침은 있어도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지 죽은 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사생관이 없다.) 또한 유교에는 제사를 빼면 딱히 종교라고 볼 수 있는 제례의식도 없고, 논어나 기타의 경전 어디에도 종교에 관련된 문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가지 노부유키는 유교는 종교이며, 도덕은 유교의 종교성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한다. 즉, 유교는 스스로의 종교성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침묵의 종교인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유교의 종교성(사생관)은 한 2~3 년 전쯤 MBC에서 방영된 김용옥 교수의 강의에서도 이야기 된 적이 있는 것인데, 기본적인 전제는 유교의 사생관은 불교나 기독교의 그것과 다르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극락과 윤회를 이야기하며 기독교는 천국과 부활을 이야기 하지만 유교에서는 그와 같은 외계(外界)를 설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교는 현실적이고 즉물적인 사고를 지닌 중국인들에게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인도의 원시불교와 중국의 격의불교는 다른 사상체계를 가진다.) 
유교에서 사람은 정신인 혼(魂)과 육체인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 대기를 이루고 백은 땅으로 들어가 자연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것을 이른바 천지인(天地人)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갈 듯하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이 천하를 이야기할 때 그렇게 강조하는 천지인은 사실은 그들의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재미있는 것은, 저자의 이러한 견해는 연세대학교의 송복 교수가 그의 저서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생각의 나무 出, 송복 著)]에서 “유교의 신은 자연 그 자체다.”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저자는 유교에서의 제사는 이 혼과 백을 불러들여 귀신(조상)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섬기는 의식이며 이것이 곧 “자연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살아서는 덕을 쌓아 성인(聖人)이 되고 죽어서는 끊이지 않고 제사를 받는 것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 즉 영혼불사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유교의 사생관이다.
그렇다면 유교의 도덕은 이와 같은 유교 사생관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저자에 의하면 유교의 도덕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성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며 그 본질은 당대의 여러문제를 끊임없이 분석, 관찰함으로써 그 대응 방식과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유교의 도덕은 그 종교성을 바탕으로 당대의 보편적인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유교의 도덕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깊고 냉철하게 통찰한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유교의 특징만은 아니다. 불교의 경우에도 불교의 종교성에 바탕을 둔 도덕(이를테면 살생을 하지 말라던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헛된 집착을 버리라든가 하는 것)이 있다. 기독교에도 기독교의 종교성에 바탕을 둔 도덕이 있다.

저자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유교의 종교성을 생각하지 않고 경전에 나오는 도덕성만 생각함으로써 유교의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이를 유교의 종교성은 눈여겨보지 않고 도덕성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편협한 유교의 사상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기에 일찍이 남송의 학자였던 섭적(葉適)도 "동중서(董仲舒) 이후 유학이 공리공담에 빠져버렸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내내 강조하며, 유교의 도덕성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효(孝)라는 점이다. 저자는 효를 생명의 연속에 대한 자각으로 간주하고 유교의 도덕성과 종교성을 모두 관통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효를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로 다루고 있다.

저자가 훌륭하고 이 책이 훌륭한 책일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단지 유교의 종교성만을 밝혀서 "유교는 종교다. 이러저러한 것들을 봐라, 내 말이 맞지." 라고 주장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유교의 종교성으로 현대의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저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현상이라는 것은 결국은 일본의 사회현상이다.) 이 책의 가치는 거의 70%가 여기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장기기증, 동북아시아 사회에서의 여성관, 가족주의, 관료정치와 교육 등 여러 문제를 유교의 종교성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개체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저자는 최근 동북아시아에서 유교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이것은 정확한 분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 유교가 힘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교도덕이 힘을 잃어가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주자학적인 유교도덕이 힘을 잃어가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다. 즉, 왜 서양의 합리적 개인주의가 동양에서는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개인주의는 이기주의 혹은 버릇없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낙인찍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동북아시아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유교의 종교성 때문에 중국과 한국, 일본과 같은 동북아시아인에게는 서구식 개인주의가 제대로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동북아시아인에게는 개체주의가 있다.
여기서 개체주의는 가족이나 종족이라는 사회 속의 개체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기에서 삶의 기반과 의미를 찾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개체주의를 무조건적인 집단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유교의 개체주의는 몰주체적인 개체가 아닌 그야말로 개성이 있는 개체를 찾는 것이다.
유교의 유명한 덕목 중 하나인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되 같아지려 하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려 하되 조화롭게 지내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라는 말은 유교의 이러한 개체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흔히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용어 때문에 이것이 도덕적 타락 혹은 가치관의 혼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도덕적 해이란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문제란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할 경우에 일어난다. 따라서 정리한다면 도덕적 해이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경우에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도 결국 도덕적 해이와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 갑자기 범죄가 증가하는지, 특히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리는지에 대한 분석도 도덕적 해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 때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유영철 사건이라든지 시민의식의 문제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가지 노부유키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출발을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근원을 이루는 유교에서부터 분석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 때 공자를 살려라, 죽여라는 등의 유교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가지 노부유키의 근본적인 차이는 우리는 유교를 오직 도덕적인 측면에서만 살폈다는 점이고, 그는 종교적인 측면도 같이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내 개인적인 판단에 의하면 본질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가지 노부유키가 조금 더 정교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실학자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는 어느날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이 중국 연경을 돌아보고 쓴 회우록(會友錄)이라는 책을 읽고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은 나머지 "밥 먹던 숟가락질을 잊기도 했고 먹던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흥미로웠다고 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밥 먹던 숟가락질을 잊고 먹던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흥미로운 책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침묵의 종교 유교]를 거론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유교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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