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맨
김종래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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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상에서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새삼 힘들고 지칠 때면 그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일찍이 어른들은 역사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아마도 이 뜻인가 싶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게도 그 수많은 영웅에서도 꼭 순위를 가리려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생존기간, 그가 이룩한 업적, 만들어낸 성과, 지배한 땅, 심지어는 그가 전쟁터에서 죽인 인명까지 다 계산해서 영웅의 순위를 매긴다. 여하간,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웅이 있다. 바로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복자, 칭기스칸이다.
칭기스칸은 1162년 몽골고원에서 1227년 원정지에서 병사할 때까지 오직 앞만 보고 내달렸던 영웅이다.(칭기스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들이 많다. 1155년 설, 1167년 설 등이 있으나 이 책에서는 1162년을 그의 출생년으로 보고 있다.) 그가 60평생을 살면서 이룩한 업적과 끼친 역사상의 영향에 대해서는 단지,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많은 땅을 지배했다는 비교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칭기스칸의 모습은 흡사 야만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털모자를 쓰고 한 손에 창을 들고는 말을 달리며 적을 죽이는 몽골전사의 모습, 거친 고원에서 움막 같은 겔을 치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 몽골부족의 모습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실제로 칭기스칸의 위인전이나 다른 역사책을 찾아보아도 막북(漠北)이라 불리며 야만족 취급을 받은 몽골부족들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는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몽골전사들의 전투력과 칭기스칸의 천부적인 재능이 몽골제국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물론 지도자의 뛰어난 능력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막강한 전투력이 광활한 몽골제국 건설에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시스템적인 이유, 어떻게 이슬람이나 중국 같은 문명국가에서는 존재하지 못한 지도자의 뛰어난 능력과 병사들의 죽음을 모르는 막강한 전투력이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부족국가에서 나타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책이 바로 [밀레니엄맨]이다.

저자는 몽골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유목민족 특유의 이동 마인드”로 설명하고 있다. 목축과 수렵으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집단생활을 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유재산의 개념이 없어지면서, 수평적, 창의적 봉사정신을 가지게 된 유목민족. 복잡하고 정해진 법이 없이 천지자연의 계시에 따라 명을 부여받고 관료에 의한 통치보다는 오지 회의를 통한 통치를 받으며 사람이 신분보다 그가 가진 기술과 능력을 더 중시하는 유목민족.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혹독한 생존기법을 터득하고, 거추장스러운 형식과 과정보다 분명한 결과를 중요시 여기며, 개방적이고 낙천적인 유목민족...
문명국가의 마인드가 농경민족 특유의 정착 마인드라면, 춥고 척박한 고원에서 야만족처럼 살아온 몽골부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유목민족 특유의 이동 마인드였다. 오랜 세월 정착생활을 하면서 타성에 젖고 게을러진 문명국가가 몽골부족에게 여지없이 무너진 것은 불을 보듯 당여한 일.
이 때 눈여겨 볼 것은, 유목민족의 이동 마인드는 단지 전투기술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동 마인드는 정치, 인재양성, 생산과 분배에 까지 심어졌다. 그래서 몽골제국은 약 200년 가까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래서 칭기스칸은 죽기 전 그의 후손들에게 유목민족의 이동 마인드를 잃지 말라는 “내 자손들이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서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는 유훈을 남긴 것이다. 

지금까지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유목민족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시스템직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면, 개방성, 속도 중시, 능력 중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끈 지도자, 칭기스칸은 어떤 능력과 리더쉽을 발휘하였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칭기스칸이 능력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들을 하고 있지만, 특히 나의 주목을 끄는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첫째는 그의 정보 활용능력이다. 현대사회는 정보사회이며, 따라서 현대의 전쟁도 정보전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소수의 병력으로도 삽시간에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보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과거 박정희에 의한 군사쿠데타,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상대에 비해 정보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칭기스칸은 당시에 벌써 정보의 활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당계급인 샤먼들을 이용해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면서 상대방의 정보를 재빨리 입수하는데 노력했다. 한편으로 이동이 자유롭고 다양한 지역을 오가는 상인들을 우대하고 상업을 장려함으로써 경제력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서 전략을 세워나갔다. 상업을 장려하여 경제력을 향상시키면서도 정보를 활용하는 기술은 뒷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일본 전국을 통일할 때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계책인데, 글자도 몰랐던 칭기스칸은 벌써 400년 전에 그 같은 계책을 생각해낸 것이다.

둘째는 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는 회의 “코릴타”의 개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칭기스칸이 틈만 나면 크고 작은 코릴타를 개최하여 문제를 논의하고 전략을 세워나갔다고 말한다. 이는 나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미 말했듯 우리는 몽골부족이나 칭기스칸은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으로 오직 강성한 전투력만 믿고 세계를 제패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강성한 전투력 뒤에는 코릴타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수많은 영웅들이 명멸해간 전국시대에서 최고의 명장을 꼽으라면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들 수 있다. 그의 귀신같은 책략과 전투력은 그의 기마부대를 전국 최강으로 만들었으며 그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연합군을 편성해서야 겨우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다케다 신겐이 이처럼 강력한 기마부대를 가질 수 있었던, 귀신같은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많지만 전술회의도 빼놓을 수 없다. 다케다 신겐은 전투에 나서기 전, 전투가 끝난 후 언제나 회의를 통해 전투를 분석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이 같은 철저한 전술회의가 그의 군대를 사상 최강의 기마부대로 만들어준 것이다.
칭기스칸에게 코릴타는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의 능력과 리더쉽도 이동 마인드에서 비롯되었음은 당연한 말이다.

이 책 [밀레니엄맨]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시스템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단편적인 현상만을 기억해온 칭기스칸과 그의 몽골제국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보여준다.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말로 용어의 해석상 흔히 “도덕적 혼란”으로 해석되어 윤리나 가치관의 혼돈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럴 해저드란 사실 시스템의 혼란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되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해결 보다 단편적인 현상에 치중하는 것을 우리는 모럴 해저드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칭기스칸에 대해 모럴 해저드를 겪어왔고, 그래서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가치 “이동 마인드”를 제대로 얻어내지 못했다. 단지 칭기스칸이라고 하면 그의 대제국 건설만 대단하다고 생각해왔을 뿐, 그가 어떻게 그런 대제국을 건설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일찍이 E H. 카(E H. Carr)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칭기스칸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칭기스칸과의 올바른 대화법을 가르쳐준다.

조선일보의 조갑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팍스 몽골리카”를 내세우며 한민족의 세계제패를 거론한다. 나는 과거에 단편적이 칭기스칸의 기록, 야만족에 가까운 몽골부족의 모습만 알고 있었을 때는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팍스 몽골리카”가 어떤 배경에서 등장했는지 수긍이 간다.
이제 무더운 여름이다. 곧 휴가철이 시작된다. 이맘때쯤이면 으레 “CEO가 추천하는 휴가철에 읽을 책”, “휴가철에 읽으면 좋은 책“ 등이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한다. 이 책 [밀레니엄맨]도 휴가철에 읽으면 아주 좋은 책이 될 것이다. 1998년에 출판되어 시간이 지난감이 있지만, 지금 읽어보아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나저나, 저자가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문체가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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