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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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해석’은 하나의 작품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해석에 의한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장르가 바로 ‘문학’이다. 손택은 그 예로 카프카를 들었다. 하나의 작품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단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작품은 해석의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계를 지닌 해석들이 멈추지 않고 생산되기에 우리의 사고가 조금씩 더 깊어지고 의미 있는 예술 작품들도 계속해서 창작되는 것일테다. 무엇보다도 손택이 강조했듯이,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카프카를 사회적 알레고리로 읽는 이들은 현대 전체주의 국가에 근원적으로 만연한 관료주의의 광기와 좌절에 관한 사례 연구를 본다.
카프카를 정신분석학적 알레고리로 읽는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 거세 불안, 무능력함,
자신의 꿈에 속박된 자기 자신에 대한 카프카의 필사적인 폭로를 본다.
카프카를 종교적 알레고리로 읽는 이들은 <성>의 K는 천국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심판>의 요제프 K는 무정하고 불가사의한 신의 정의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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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선집 2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 그린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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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힐 수 없는 공동체>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대한 모리스 블랑쇼의 응답이자,내가 처음 읽었던 브랑쇼의 글이다. ​역시나 모호하고 어려웠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예로 든 ‘연인들의 공동체’와 같은 글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당시 나의 관심사는 바타유, 뒤라스, 양혜규였다.) 나는 이 베일에 싸인 작가의 또 다른 글을 읽어보고 싶었으나 좀처럼 국내에 소개된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랑쇼의 선집이, 그것도 아주 방대한 분량으로 출판되었다. 블랑쇼의 선집은 ‘문학’과 ‘글쓰기’에 관한 저서들이라 나의 관심사를 모두 담고 있다. 그 중에서 목차를 보고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카오스의 글쓰기>만을 우선 구입했다.


카프카의 영향으로 요즘 <문학의 공간>을 아주 천천히 읽고 있다. 블랑쇼는 문학의 본질을, 글쓰기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해 끊임없이 카프카를 추적하고 질문하고 마주한다. 절망에서시작된 글쓰기가 비범한 문학작품이 되기 까지 생각해 보았다.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과정. 현실과의 혹독한 싸움. 부정하고 싶은 자아와의 싸움. 또 다른 세계, 타인들과의 충돌.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숙명적인 ‘쓰기’의 시간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 이상으로 문학에 대한 커다란 열망을 지녔던 카프카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바깥’에서 서성였을까. 카프카는 문학 안에서 많은 것을 시도했으나 정작 본인은 후회와 번민으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던 모든 것들이 순탄했더라면 과연 이토록 귀한 작품들이 탄생했을까? 나는 오히려 절망이 카프카를 완성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절망으로 시작된 글쓰기 덕분에 누군가는 희망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카프카에서 카프카로>까지 언제 다 읽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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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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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시적인 제목에 이끌려 로맹 가리의 단편을 읽기 시작하다가 소설보다는 소설가, 로맹 가리라는 한 사람에게 더 빠지게 되었다. 그를 너무 아낀 나머지 이 작가는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할 만큼. 비밀스러운 삶은 언제나 내게 호기심과 동경을 동시에 불러 온다. 누군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이기도 했던 그의 이중생활은 작품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두 명의 문학적 자아를 지니고 있던 그의 정체는 ‘결전의 날’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페루에 가서 죽는 새처럼 자살한 이후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 의해 밝혀졌다.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일까. 이미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그는 거장에게 으레 돌아오는 찬사를 거부하고새로운 분신, 에밀 아자르를 빌려 로맹 가리라는 후광을 지운 채 <그로칼랭>을 발표했다.


그로칼랭이라 이름 붙인 내 비단뱀과 있을 때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받아들여지고 존재에 둘러싸인 기분이 드는 것이다. 비단뱀이 내 몸을 감아 허리와 어깨를 꽉 조이며 목에 제 머리를 기댈 때 눈을 감으면 다정하게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내가 온몸으로 열망하는 불가능의 끝이다. 


미셀 쿠쟁의 방은 분명 나와는 다른 비밀의 방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비단뱀과 함께 살고 있는 방이라니. 비록 나는 쿠쟁(37살, 미혼, 샐러리맨)처럼 외롭지는 않았지만 220cm 비단뱀이 지금 이 방에 같이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쿠쟁은 한 호텔에서 운명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비단뱀을 구입했고 그 녀석이 침대 위로 올라와 자신을 꼭 껴안아 주었던 것을 계기로 ‘그로칼랭(=열렬한 포옹)’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너무 그럴듯한 이름 아닌가?!) 놀랍게도 쿠쟁에게 있어서 그로칼랭은 연인,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  


내가 불안하고 불행할수록 그로칼랭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로칼랭은 그것을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몸을 늘여 나를 감아주지만, 때로는 그것도 부족해서 몇 미터, 또 몇 미터가 더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애정 때문이다. 애정은 내부에 구멍을 파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 놓지만, 막상 거기에 애정이 없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고 이유를 찾게 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 기괴한 우화는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존재론적인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새 쿠쟁 편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고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불가능의 끝’을 체험하게 된다. 소설에 빠져 있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은 ‘가능’하니까.(물론 그로칼랭이 되는 것도!) 쿠쟁이 좋아했던 회사 동료 드레퓌스씨를 사창가에서, 그것도 동료가 아닌 고객으로 만나 나누는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하다. 살짝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쿠쟁의 독백은 더욱 의미심장해지고.

 

자리에 누우면 내 몸 둘레에 팔이 없는 것이 여전히 고통스럽고 드레퓌스 씨가 있던 부위가 몹시 아프지만, 그것이 정상이라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다리를 절단한 사람들은 다리가 있던 부분이 계속 아프다는 것이다. 절단과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결핍 상태이다.

 

<그로칼랭> 출간 당시 에밀 아자르는 출판사로부터 논란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결말 부분을 줄여달라고 강요 받았다. 로맹 가리일 수 없었던 에밀 아자르는 공식적으로 신인작가였기 때문에 출판사의 요청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사후 그가 원래 작성했던 생태학적 장(章)이 추가되었지만 생태학적 결말 못지 않게 이 엔딩도 무척 매력적이다.


누군가가 층을 잘못 알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라디에이터가 정답고 상냥하게 꾸르륵거린다. 전화벨이 울리고 아주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명랑하게 “자노? 당신이야?” 하고 말을 건다. 그러면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다. 그동안은 자노이고 당신이 된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허전해질 걱정이 없다. 

 


로맹 가리이든, 에밀 아자르이든 그의 소설이라면 언제나 ‘열렬한 포옹’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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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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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녀가 자살하던 날의 혹한만큼이나 지독했다. 1963년 2월, 옆방에서 잠이 든 두 아이, 프리다와 니콜라스를 위해 빵과 우유를 차려놓고, 행여나 가스가 새나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테이프로 문틈을 밀봉한 채, 수면제를 먹은 상태에서 가스 오븐을 켜놓고 눈을 감은 실비아. (사랑니를 뽑기 위해 치과에 갔을 때 마취제와 가스 중에 어느 것이 좋겠냐는 의사의 물음에 ‘가스요’라고 단호히 대답했던 그녀는 이것이 마치 어떻게 죽을 것인지 묻는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시’에 대한 강한 애정을 지녔던 플라스는 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으로 완벽한 삶을 꿈꾸는 듯했으나 남편의 외도와 그로 인한 별거로 어둠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뿐이었다. 실비아는 아이들이 잠든 새벽에 일어나 시와 소설을 썼고, 죽기 직전에는 한 달에 무려 30편 이상을 써 내려가면서 그녀가 바라던 대로 문학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작품, <에어리얼(Aerial)>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결국 극심한 우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 한 살 때의 일이다.

8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플라스는 심리적으로 방황 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는 평생 동안 트라우마를 남기면서 삶과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사춘기 소녀 실비아는 문학에 빠져들면서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장했지만 때로는 성적인 욕망과 질투심 때문에 고민하는 대범하고 당찬 소녀이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던 실비아는 한 문예지의 창간 파티에서 휴즈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그와 함께 전원생활을 즐기며 ‘시’라는 둘만의 공통 코드를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충실하고, 창조적이고, 건강하고 소박한 부부’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플라스의 유일한 소설 <벨 자(Bell Jar)>에서 에스더가 느꼈던 참혹하고 절망적인 현실은 그녀의 현실에서도 존재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휴즈와 진정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밀폐된 벨 자(종 모양의 유리 그릇) 속에 갇힌 채, 그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별거 이후 오직 시에만 매달리며 좋은 시를 쓰기 위해 강박증에 시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기만 하다.

플라스는 <라자로 부인>이라는 시에서 ‘죽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어려워서였을까.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낳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천재 시인’, ‘비극적인 삶’, ‘희생 양’ 등등 수많은 수식어들과 함께 그녀를 전설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를 읽으며 느낀 것은 그동안 ‘신화’와도 같은 극적인 드라마로 포장된 플라스가 아닌 너무나 솔직하고 인간적인 플라스였다. 때로는 이기적이고 자학적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외롭고 우울했으며, 때로는 사랑스럽고 따뜻했던 실비아 플라스. 그녀는 ‘살기 위해’ 죽었다. ‘영원히’ 살기 위해.


글쓰기가 나의 건강이다. 차가운 자의식에서 벗어나 만사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면,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뭘 얻을 수 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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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 - 고대 그리스가 사랑한 여인
마르자 드스지엘스카 지음, 이미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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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에 한참 빠져 있을 때 영화 <아고라>를 보고 ‘히파티아’라는 철학자를 알게 되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극을 받게 된다. 용기와 지혜. 이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접하면 예전과 달리 히파티아를 유심히 보게 된다. 회화가 전적으로 솔직할 수 없지만 그의 실체와 얼마나 닮았을지 궁금하긴 하다. 

폴란드 역사학자의 <히파티아(Hypatia of Alexandria)>를 읽어 보았다. 부제는 고대 그리스가 사랑한 여인.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발견하고 좋아했는데 아쉽게도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저자 역시 히파티아의 저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건 상당히 유감이라며 자료의 빈약함을 토로한다. 나는 그가 페미니즘의 전형으로 신화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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