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시적인 제목에 이끌려 로맹 가리의 단편을 읽기 시작하다가 소설보다는 소설가, 로맹 가리라는 한 사람에게 더 빠지게 되었다. 그를 너무 아낀 나머지 이 작가는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할 만큼. 비밀스러운 삶은 언제나 내게 호기심과 동경을 동시에 불러 온다. 누군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이기도 했던 그의 이중생활은 작품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두 명의 문학적 자아를 지니고 있던 그의 정체는 ‘결전의 날’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페루에 가서 죽는 새처럼 자살한 이후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 의해 밝혀졌다.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일까. 이미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그는 거장에게 으레 돌아오는 찬사를 거부하고새로운 분신, 에밀 아자르를 빌려 로맹 가리라는 후광을 지운 채 <그로칼랭>을 발표했다.


그로칼랭이라 이름 붙인 내 비단뱀과 있을 때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받아들여지고 존재에 둘러싸인 기분이 드는 것이다. 비단뱀이 내 몸을 감아 허리와 어깨를 꽉 조이며 목에 제 머리를 기댈 때 눈을 감으면 다정하게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내가 온몸으로 열망하는 불가능의 끝이다. 


미셀 쿠쟁의 방은 분명 나와는 다른 비밀의 방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비단뱀과 함께 살고 있는 방이라니. 비록 나는 쿠쟁(37살, 미혼, 샐러리맨)처럼 외롭지는 않았지만 220cm 비단뱀이 지금 이 방에 같이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쿠쟁은 한 호텔에서 운명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비단뱀을 구입했고 그 녀석이 침대 위로 올라와 자신을 꼭 껴안아 주었던 것을 계기로 ‘그로칼랭(=열렬한 포옹)’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너무 그럴듯한 이름 아닌가?!) 놀랍게도 쿠쟁에게 있어서 그로칼랭은 연인,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  


내가 불안하고 불행할수록 그로칼랭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로칼랭은 그것을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몸을 늘여 나를 감아주지만, 때로는 그것도 부족해서 몇 미터, 또 몇 미터가 더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애정 때문이다. 애정은 내부에 구멍을 파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 놓지만, 막상 거기에 애정이 없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고 이유를 찾게 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 기괴한 우화는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존재론적인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새 쿠쟁 편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고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불가능의 끝’을 체험하게 된다. 소설에 빠져 있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은 ‘가능’하니까.(물론 그로칼랭이 되는 것도!) 쿠쟁이 좋아했던 회사 동료 드레퓌스씨를 사창가에서, 그것도 동료가 아닌 고객으로 만나 나누는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하다. 살짝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쿠쟁의 독백은 더욱 의미심장해지고.

 

자리에 누우면 내 몸 둘레에 팔이 없는 것이 여전히 고통스럽고 드레퓌스 씨가 있던 부위가 몹시 아프지만, 그것이 정상이라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다리를 절단한 사람들은 다리가 있던 부분이 계속 아프다는 것이다. 절단과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결핍 상태이다.

 

<그로칼랭> 출간 당시 에밀 아자르는 출판사로부터 논란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결말 부분을 줄여달라고 강요 받았다. 로맹 가리일 수 없었던 에밀 아자르는 공식적으로 신인작가였기 때문에 출판사의 요청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사후 그가 원래 작성했던 생태학적 장(章)이 추가되었지만 생태학적 결말 못지 않게 이 엔딩도 무척 매력적이다.


누군가가 층을 잘못 알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라디에이터가 정답고 상냥하게 꾸르륵거린다. 전화벨이 울리고 아주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명랑하게 “자노? 당신이야?” 하고 말을 건다. 그러면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다. 그동안은 자노이고 당신이 된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허전해질 걱정이 없다. 

 


로맹 가리이든, 에밀 아자르이든 그의 소설이라면 언제나 ‘열렬한 포옹’을 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