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
박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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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기사를 바탕으로 4년간 치밀하고 신중하게 다듬은 이야기는 87년의 그날로, 2015년의 그날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생생한 고통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고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물음. 이 불행은 과연 생존자들만의 것일까.

 

이야기는 입양아 준이 친모의 검안서, 형제의 집 입소기록 카드를 전달 받으면서 시작된다.

준은 엄마인 은희가 수용소 내 폭력으로 숨졌고, 수감자의 강간으로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엄마를 알고있다는 미연을 찾아나섰지만, 미연 또한 형제의 집 피해자였기에 다가서기 쉽지않다.

그녀에게 던지는 질문조차 폭력이 될 수 있으므로.

준과 미연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두고, 은희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뒤쫓는 동행이 시작된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병호, 형제의 집을 잊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미연,

폭력으로 숨진 엄마 은희의 흔적을 찾는 준, 형제의 집에서 발생한 동성 간의 성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은수,

탈출하는 은희를 죽기직전까지 폭행한 소대장 김무열, 은희의 죽음을 '신부전증'으로 조작한 산부인과 전문의 병국, 

모든 기억을 잃고 홀로 남겨진 방인곤 원장, 모든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던 주태석 검사.

숨기고, 파헤치고, 잊혀지는 뒤엉킴 속에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 끝에 도달한 진실에 온전히 비난 할 수 없는 것은, 누군가 짊어졌던 참혹한 무게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거리의 빈곤을 청소해야한다. 국가는 약자들을 한 곳에 가둘 명분을 만들었다.

길 가던 아이,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 취객, 친구와 놀던 아이, 목욕탕으로 향하던 사람.

온갖 사람들이 '부랑자를 갱생'하기 위해 형제복지원으로 납치되었다.

시설 곳곳에서 행해지는 폭력적인 행위들은 국가의 묵인과 함께 점점 대담해졌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알려고하지 않는 것이었고, 못본 척 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이가 있으니 손 안대고 코 푸는 셈이었다.

생존자들이 입을 열었을 때 모두가 보았다.

국가가 약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그리고 가진 자의 손에 쥐어진 권력을.

그렇게 빈곤은, 약하다는 것은 공포가 되었고, 밀어내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형제복지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복제된 형제원들, 철장 밖 모두의 이야기였다.

빈곤층에게 가해지는 국가의 폭력을 보았기에 가난에 대한 부정적이 인식이 생겼고,

박인근을 감싸는 국가와 사법부를 보았기에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높아졌다.

정의의 여신상의 저울은 힘있는 자들 쪽으로 기울었고, 법전은 힘있는 자들의 궤변을 뒷받침하기 위해 펼쳐졌다.

국가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했고, 약한 이들은 점차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지금도 수많은 형제복지원과 은희가 존재하고 있다. 87년에 시계가 멈춰버린 것은 생존자들 뿐일까.

 

생존자들의 피와 눈물섞인 농성끝에, 20대 국회의 마지막에 가까스로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비록 보상에 대한 것이 제외된 반쪽짜리 법이지만, 생존자들이 87년의 기억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디딤돌이 생겼다.

그리고 나도 작가가 얹어준 불행을 기꺼이 짊어지고 세상의 은희를 위해 조용히 손을 맞잡으려한다.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지라도 두 눈으로 이 여정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형제복지원을 두고 소설이 나왔다니. 조금만 헛디뎌도 자극적인 이야기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기사들은 피해자들이 당한 가혹적인 행위를 집중조명 했다고 한다.

(: 동성간의 성폭행, 수용자 간의 폭력행위)

책에서도 미연의 고백을 들은 언론들이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살인자로.' 라는 자극적인 기사를 보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많은 것을 우려하며 읽었고,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온 작가님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년이 온다>가 한강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면, <은희>또한 박유리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타인의 고통이라 생각하여 외면해온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87년의 은희에게로 나를 이끌어준 작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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