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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비밀의 책 1 ㅣ 판타 빌리지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변용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을 접했을 때에는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신비롭지만 사적이고 예쁘기만 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녀'와 '비밀'이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견, 또 붉고 푸른 홀로그램 오색빛 신비로운 문양이 아로새겨진 책의 외양(불빛 아래에서 실물로 보면 굉장히 예쁘다) 때문에 말이다.
책장을 처음 넘겼을 때는 '아라비안 나이트'구나 생각했다. 신비로운 사연으로 눈꺼풀에 이야기를 세밀하게 새기고 살게 된 소녀가 이야기를 해주는 큰 틀도 그렇고, 소녀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왕자와 소녀가 사는 그 궁궐도 하렘이 있는 것이 딱 아라비아 궁궐 같은 느낌이었다. 세헤라자데는 이야기를 궁금한 곳에서 끊어서 목숨을 연명하지만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없어서, 또는 들킬까 봐 이야기를 끊는다.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 A가 B를 만나서 B의 이야기를 듣고, B의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C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 또한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다.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만이 아니라 러시아나 유럽 민담에서
본 듯한 배경과 등장인물 (또는 등장괴물)이 나와 세상의 신비한 것들이 모두 모인 인상 또한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읽어나가다 보면 이 작품이 충실한 동화의 재연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왕자는 이야기 속에서 응당 받기 마련인 도전을 만나기도 전에 큰 실수를 저지르고, 응당 연출해야 할 용감한 장면도 없이 고된 여행을 한다. 예언이나 속담처럼 이야기 속에서 이어져내려오던 맹약의 말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괴물 같은 외양을 하고 있는 마녀가 준엄한 카리스마를 드러내며 옛이야기와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등 책을 읽어나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고정관념에 통렬한 일격을 먹는 일이 다반사이다. 섬세하고 신비로운 이야기인 것은 맞았지만, 감성적이고 사적이고 예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섬세한 것조차 감성의 섬세함이 아니라, 한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이야기에서 등장하여 끝내는 전체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퍼즐적 측면의 섬세함이었고, 이야기 곳곳에서는 한없는 사랑과 위대한 모험, 시적인 신화보다 더 처절한 고통, 잔인한 형벌, 치 떨리는 어리석음이 흘러넘친다.
매우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달라. 소녀의 이야기를 듣는 왕자는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다가 혀가 꼬일 정도로 고생만 하고 두서없는 미친 이야기를 조금 풀어놓고 마는데, 섣불리 줄거리를 요약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 형태 그대로, 음유시인이 읊듯이 읽어나가야 맛이 난다. 맛이 나는 건 둘째 치고 그래야만 한다. 이야기의 큰 실타래는 아주 작은 실타래들이 음유시인만이 알 수 있는 질서로 엉켜 있는 그대로 따라가야만 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야기의 기술이고, 음유시인의 전문성이다.
그러니 본질적인 면에서 이 책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후계자가 맞다. 진정한 음유시인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다음 권은? ... 소녀의 눈꺼풀은 아직 검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아직 마지막 빛을 전하지 않았잖은가? 책으로 나온 큰 이야기 둘은 그 안에서 완결을 지었지만 소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남아 있어 결말이 궁금하다. 물론 이런 멋진 이야기를 더 읽고 ... 아니 듣고 싶은 마음도 크다. 이야기! 이야기를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