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 당신의 몸과 마음이 아플 때,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것들
김준혁 지음 / 계단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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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는 반전의 책이었습니다. 의료인의 일상 속 잔잔한 감동을 다룬 에세이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전달하는 메시지가 크고 많았습니다. 처음 알게 된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았고, 하나같이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 써도 좋을 만큼 드라마틱하고 생각거리를 많이 담고 있었어요. 세상의 어떤 문제들은 정의로운 운동가의 집요한 투쟁에도 끄떡없다가 영화 한 편의 흥행으로 거짓말처럼 해결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정의감 넘치는 영화제작자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대박 예감 시놉시스 모음집같았달까요. 4부로 구성해 의사 개인에서 의료 시스템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범주를 확장해가며 질문의 차원을 달리하는 짜임새도 좋았고요.


저는 저자가 이책에 실린 현대의학을 형성하고 움직인,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제대로 된 목적지에 가닿지 못한 편지라고 한 표현이 좋았습니다. 수취인불명으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이 편지들이 흉터를 머금은 채 질문을 던지며 아직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그 편지들을 정성껏 모아 책으로 엮어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의학이라는 존재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라고 한 추천사에도 무척 공감하는데요, 더 자세히 말하면, 의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에 대해 이토록 깊고 넓게 고민하고 분투하는 따뜻한(또는 따뜻해야 하는) 학문인 줄 처음 알아본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답을 듣지 못한 저 질문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소개된 사례들은 팩트 위주의 짧고 건조한 기술만으로도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저자가 주목한 문제점 말고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문제점도 엿보였습니다. 이를테면 제멜바이스의 사례에서 저자는 의사들의 소통 실패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 이면에는 산욕열로 죽어 나가는 산모들을 살리는 것보다 자신의 명성과 이력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선배 의사들과 조직이 위계를 동원해 제멜바이스와 그의 발견을 묻어버린 일이 더 위중하고 사악해 보였습니다. 그 같은 일은 다른 영역에서도 비일비재하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죠. 또 할스테드의 사례는 마약중독자인 그가 지치지 않는 의사의 기준으로 만든 가혹한 레지던트 시스템의 부정적 측면과 부작용을 지적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보적 전문성과 권위를 갖춘 의사를 길러내기 위한 끊임없는 집단적 노력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로 불리지만 알고 보면 이렇다 할 체계적인 교육과 성장이 이뤄지지 않는 분야가 적지 않은 것 같거든요.

 

2부에서는 무엇이 정상이고 표준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례들이 소개됩니다. 여성으로 태어나 의사(당시 남자에게만 허용됐던)로 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남성으로 위장하고 살았던 제임스 배리, 자신에게 내려진 처방에 담긴 성 편견을 고발한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의 작품 누런 벽지, 동성애가 범죄에서 정신질환으로, 다시 비질환이 되기까지의 과정,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병신이라고 지칭한 병신으로 살다 On Being a Cripple의 저자 낸시 마이어스의 이야기. 우리가 정상비정상또는 표준비표준을 나누며 얼마나 편향적인 사고에 갇혀 사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특히 낸시의 사례에서 언급한 장애인 권리 운동가의 휠체어 마을상상은 충격적입니다. 주민 모두가 휠체어를 타는 마을에 어느 날 휠체어를 타지 않은 사람이 도착하고, 그는 마을 주민에게 맞춰 낮게 설계된 곳곳의 시설에서 부딪히고 다치며 불편함을 겪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걱정하며 저런, 휠체어를 타지 않으니 저런 사고를 당하지. 다리를 잘라서 휠체어를 타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합니다. ‘장애의 사회적 규정과 의미에 대한 질문이 뒤통수를 때립니다.

 

3부의 사례는 2부의 문제의식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생학의 악용이 낳은 역사적 비극, 피임과 낙태를 둘러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서 생명윤리나 인권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던 사회적 필요와 역학관계, 정신질환자를 위한 치료기관이기보다 격리수용기관이었던 정신병원과 탈원화 운동의 사례들이 소개됩니다. 4부에서는 1,2,3부의 사례들을 포함한 의학적 문제들이 환자와 병원, 의학적 치료의 범주를 넘어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뤄져 왔고 또 다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이야기를 합니다.

 

책에서 다루는 다양한 사례들은 결국 인권의 문제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의학적 관점에서는 치료를 위해 질환과 정상, 환자와 정상인을 구분하는 일이 불가피한데, 그러한 구분은 고스란히 사회적 편견과 연결됩니다. 전체 사례 가운데 압도적으로 슬픈 이야기는 2부 끄트머리에 소개된 데이비드 라이머 이야기입니다. 생후 6개월에 어처구니없는 수술 실수로 얻은 장애, 장애를 덮으려 아기에게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 더 어처구니없는 의사와 부모의 결정, 의사의 인생을 건 연구 업적을 위해 소비된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그에게는 너무나 많고도 가혹한 의학적 불운들이 겹쳤습니다. 그 같은 불운들을 그래도 딛고 넘어서 보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노력과 행복한 삶에 대한 갈구가 끝내 무너진 것이 너무 슬프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자살로 끝낸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을 처참한 고통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부모의 무모한 결정이었고, 그 결정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자식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걱정이었습니다. 의료 현장에서, 의료 정책 결정의 현장에서,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으로 재단한 수많은 정책 결정의 현장에서, 섣부른 걱정과 어설픈 배려, 무모한 선의로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인권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책을 읽은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책을 통해 저자가 던진 수많은 질문들의 잔상이 길게 남아서 친구와 대화하다가도 이 책 속 사례를 자주 언급하게 되더군요. 아픔, 남겨진 흉터, 가닿지 못한 편지들... 이러한 질감의 말에서 저자가 의사로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라보는 자기성찰적 관점과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함이 있는 견해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더불어 책에서 저자가 사례와 함께 언급한 다양한 책과 영화 정보도 쏠쏠해서 시간 날 때마다 곶감처럼 하나씩 빼먹으려고 목록을 차곡차곡 챙겨두었습니다. 또 다른 독서로 연결해주는 씨앗 보따리 같은 책으로 한동안 옆에 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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